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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승우 Aug 17. 2018

일제의 쌀 수탈로 사라진 단어 '섬'

심청전의 공양미 3백섬은 얼마일까?

과거에는 쌀의 양을 잴 때 무게가 아니라 부피로 계산했다. 과거에 사용되던 홉, 되, 말, 섬은 부피를 재는 단위였고, 쌀 한 말은 지금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부피로는 18ℓ며 무게로 환산하면 16kg이다. 한자로 두(斗)라고 쓰는 한 말은 열 되이고, 열 말은 한 섬이다. 한 섬은 180ℓ로 곡식의 종류나 상태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벼는 200kg, 쌀은 144kg, 보리쌀은 138kg이다. 한 섬은 열 말이지만 신라 시대에는 15말로 계산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쓰는 도량형에는 가마가 없다. 쌀을 재는 단위는 섬을 썼다.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에서는 섬이라는 단위 대신 가마니를 쓰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쌀을 수탈할 목적으로 가마니를 사용하면서 단위가 변했고 가마니를 줄여서 가마라고 불렀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가마니는 1900년대 초 일본에서 가마니틀이 들어오면서 일본어인 가마스( かます)에서 유래됐다. 볏짚으로 꼰 가는 새끼줄을 씨줄로 하고, 1낱을 날줄로 하여 베처럼 짜서 자루로 만든 것이 가마니다. 볏짚의 길이가 가마니 폭으로 용적은 100ℓ로 쌀은 80kg, 보리는 76.5kg을 담을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섬(180ℓ)보다 훨씬 작았으나 두께가 두껍고 촘촘해 낱알이 작거나 도정된 곡물도 흘리지 않고 담을 수 있는 장점과 함께 일본에서 쌀을 가마니로 수매하면서 일상생활에서도 점차 쌀 단위가 섬에서 가마로 바뀌었다. 가마니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한 말의 개념도 16kg에서 8kg으로 줄어들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공공비축미 수매현장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과 김도형 연세대 교수가 쓴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수탈사'에 따르면 일제는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가마니 보급에 앞장섰다. 전쟁이 본격화되면서는 군수용품과 무기 조달을 위한 '애국 가마니' '가마니 보국'이 강조됐다. 1930년대 말 조선에서는 가마니를 연간 1억장 만들어야 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마대와 지대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PP마대가 40 kg 단위로 생산돼 추곡 수매 등에 널리 쓰이게 되어 가마니는 많이 쓰이지 않게 되었고 최근 공공비축미는 1톤을 담을 수 있는 톤백을 사용한다.      


한섬이라는 단위는 일제 강점기 이후 사장된 단어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청전에서는 공양미 삼백섬으로 사용하고 있다. 쉽게 바뀌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도량형이다. 간혹 섬이 아니라 석이라고 쓰는데 이는 틀린 표현이다. 심청전의 공양미 300섬은 한 섬 144kg에 300을 곱하면 4만3200kg, 즉 432톤이다. 현재 쌀값(80kg 17만5000원)으로 환산하면 공양미 300섬은 9219만원으로 대략 1억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참고로 쌀 한 가마 생산비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산 논벼(쌀) 생산비 조사결과에 따르면 쌀 20kg 당 2만4025원이다. 이를 한 가마 80kg로 따지면 9만6100원이다. 벼 생산비는 면적을 기준으로 집계를 낸다. 10a(300평)당 생산비는 67만4340원으로 2015년보다 생산비가 1만7529원 감소했다. 이는 직접생산비는 비료비, 농약비 등이 증가해 0.8% 늘었지만 간접생산비가 쌀값 하락에 따른 토지용역비 감소하면서 전년보다 8.3%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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