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고기 식문화사
한국인은 닭고기를 가장 좋아한다? 1인1닭 시대가 도래했고 치킨과 맥주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술과 안주이다. 국가대표 축구경기, 야구장에서 빠지지 않는 치킨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치킨이 없던 시절엔 닭을 어떻게 먹었을까. 치킨은 닭튀김이라고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대중은 치킨이라 부르고 누구나 알아듣는다.
한국인이 외식할 때 가장 선호하는 닭고기 요리는 치킨이다. 국립축산과학원 조사에 따르면 가정 내의 닭고기 전체소비량 중 32.7%를 ‘닭튀김(치킨)’으로 소비했다. 연간 1인당 가족끼리 외식으로 소비하는 닭고기는 3.17kg이었고, 63.1%에 해당하는 2kg을 치킨으로 소비했다. (사)소비자교육중앙회의 닭고기에 대한 소비자 의식 및 소비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닭고기 섭취시 선호하는 요리방법으로 응답자의 33.2%가 닭볶음탕을 뽑았고 그다음으로 닭튀김(치킨 32.3%)을 선호했다. 현대의 한국인들이 닭을 볶거나 튀겨먹는 걸 가장 좋아하는 걸 알 수 있다.
과거 흑인이 미국 농장지대에서 노예로 일할 당시 정통 미국식 닭요리법은 오븐에 닭을 굽는 ‘로스트 치킨’이었다. 살이 많은 부위만 사용하고 날개와 발, 목 부위는 버려졌다. 이를 흑인 노예들이 주워 기름에 튀겨 먹은 것이 후라이드치킨의 유래가 됐다. 기름에 튀긴 닭은 흑인 노예들에게 좋은 영양 공급원이 됐고, 이 조리법이 알려지면서 후라이드치킨이 백인 농장주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 남부 켄터키주에서 후라이드치킨을 팔던 커널 샌더스가 1952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건너가 ‘KFC’를 열면서 세계적으로 퍼지게 됐다.
한국에서는 1977년 최초의 프라이드 치킨집인 림스치킨이 신세계백화점에 개업하면서 치킨의 시대가 열렸다. 1979년에는 롯데리아에서 조각 치킨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중소규모의 프라이드 치킨집들이 생겨났다.
1984년, 두산을 통해 KFC가 서울 종로구에 들어왔다. 당시 KFC의 치킨 가격은 매우 비싼 축에 속했으나 청춘들의 미팅 장소로 주목받으며 특유의 매콤하고 기름진 맛이 차츰 국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대구의 계성통닭과 대전의 페리카나에서 최초로 양념치킨을 선보이며 소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의 시대를 열었다.
참고로 Fried chicken의 한국어 순화어는 닭튀김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후라이드 치킨이라고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영어 F 발음이 일본에서는 ‘ㅍ’이 아니라 ‘ㅎ’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후라이드라고 부르던 명칭이 한국에서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어 표기법으로는 프라이드가 맞다. 계란 후라이도 일본식 영어의 잔재이다.
영양센터에서 팔던 전기구이통닭
치킨의 시대에 앞서 60~70년대는 전기구이통닭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60년 서울의 중심거리인 명동에서 명동영양쎈터가 문을 열면서 대한민국에서는 통닭이라는 말이 닭고기 요리를 대신하는말이 됐다. 당시 영양쎈터라는 상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닭은 한 마리를 통째로 요리해 먹는 방식을 선호했고 닭고기 자체가 보양식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60~70년대 신문에까지 광고를 낼 정도로 전기구이통닭은 인기도 많았고 점점 경쟁이 치열해졌다.
1963년 한 해 동안 경향신문에 전기구이통닭 영양쎈터 광고가 돌출광고 형태로 24회 등장하면서 거의 처음으로 전기구이통닭 광고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65년 12월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미니광고를 하면서 본격적인 전기구이통닭의 시대를 연다. 전기구이통닭은 영양식으로도 그리고 부잣집의 간식으로 선망을 받으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됐고 경쟁도 치열해졌다.
1966년부터 영양쎈터 광고가 급증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당시 전기구이통닭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늘어나자 유사상표에 속지 말라는 내용의 광고가 신문에 등장했고 광고의 크기도 커졌다. 1965년에는 광고에 원조라는 문구가 나오기 시작했고 프랜차이즈는 아니지만, 분점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충무로영양쎈터는 광고에 부산, 대전, 대구, 인천 분점이 있다는 문구를 넣었다.
60년대부터 전기구이통닭은 크리스마스에 먹는 별미 간식이었고 부유층들은 소풍과 야외나들이에도 지참하는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1968년에는 영양쎈터가 아니라 치킨쎈터가 광고를 냈다. 새로운 상호의 등장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치킨이라는 명칭으로 상호를 낸 곳이기도 하다. 1968년 6월 29일자에 실린 치킨센터의 광고는 파격적이었다. 배달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주문접수, 배달 환영’이라는 광고 문구는 전기구이통닭 광고에서는 처음 나왔고 본격적인 통닭 배달의 시대가 열렸다.
그해 12월 24일 매일경제에는 자양쎈타라는 상호의 광고가 등장한다. 후발주자라 광고 크기도 남들보다 컸다. 1969년 신문에는 나의 단골집이라는 코너에 충무로영양센터가 소개되는 등 전기구이통닭은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1970년대 전기구이통닭은 장사가 제법 된 것으로 보인다. 1971년 국세청이 전기구이통닭을 호경기업종으로 선정해 세율을 올릴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1978년 기사를 보면 음식업 매출 순위에서 전기구이통닭은 15억8천만원으로 4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통닭의 시대는 전기구이에서 후라이드로 바뀐다. 1981년 기사에 “절약의 시대를 맞아 값싼 맥주목로가 주점가를 휩쓸고 있는가 하면 이름도 생소한 미국식 닭튀김집인 켄터키치킨이 재래의 통닭구이집을 사양화시키면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된다. 생맥주집과 미국식 닭튀김집이 주류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는 전기구이에서 튀김으로 제조방식도 바뀌고 양념통닭의 등장으로 다양한 닭튀김 요리가 등장하고 70년대에 이어 생맥주집도 호황을 누리면서 치맥의 시대를 암시했다. 특히 분점을 내던 방식도 체인점으로 형태가 바뀌고 이나마도 2000년대 들어서는 프랜차이즈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해방 이후 70년대까지는 찜이 대세
1945년 해방 이후 닭고기는 국이나 탕, 찜으로 주로 요리해 먹었다. 1945년에서 1990년대까지 출판된 음식 조리서에 수록된 닭고기 조립법과 빈도를 보면 물을 이용해 만드는 습열조리법이 198회, 건열조리는 50회, 기타조리는 28회 순으로 나타났다. 조리서 분석결과 습열조리법은 국, 탕, 전골이 79개로 28.6%를 차지했고 찜이 63개로 22.8%를 차지해 가장 많이 출연했다. 건열조리법으로는 구이, 산적이 27회(9.8%), 밥, 죽 21회(7.6%), 삶음이 19회, 볶음 15회, 냉채, 초 등이 12회 나타났다.
1945년 이후 닭고기 요리법은 닭찜이 가장 많았다. 기실 한국 음식에서 전골, 볶음, 찜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찜이란 육류, 어패류, 혹은 채소 등에 갖은양념을 해 국물의 양을 적고 묽지 않게 붓고 끓이거나 쪄서 만든 음식으로 찜은 한국의 대표적인 조리법이다. 한국의 근현대 조리서에 등장하는 닭찜은 영계를 주재료로 사용했고 통닭 또는 토막 낸 닭의 형태로 요리했다.
백숙은 조선 시대에 없었다
조선 시대 닭고기 요리가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 것은 율곡 이이가 쓴 ‘전원사시가’이다. 전원사시가에 연계증(漣鷄蒸)이란 닭고기 요리가 나온다. 연계는 연한 고기의 닭을 뜻하는 것으로 현대에 와서 영계로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연계를 알을 낳기 전까지 키운 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닭의 뱃속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찌는 방식이라고 나온다. 1719년 진찬의궤에 닭고기 요리인 금중탕이 기록되는 등 궁중연회에 이용됐고 1975년 원행을묘 정리의궤에 자증 이외에 여러 가지 닭요리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금님의 수라상에도 닭고기 요리가 자주 이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 여름 삼복더위 복중에 몸보신으로 많이 이용되는 백숙은 조선 시대에는 없었다. 복날에도 국 종류는 구장(개고기)이 기록되었을 뿐이다. 1921년 조선요리제법에 등장하는 ‘닥국’이 백숙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복날에 먹는다는 기록은 없다. 1943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백숙 조리법 끝에 여름에는 일등으로 보양한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복날 삼계탕을 먹는 문화는 근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1670년부터 1943년까지 발행된 조리서 중에서 닭요리가 기록된 22개의 조리서를 분석해보면 닭을 요리하는 방법은 25종류였다. 이 중에서도 적계법이 19회, 연계증 16회, 초계법 10회, 칠향계 9회, 계탕 7회 계죽 6회, 총계탕 5회, 닭저 5회, 백숙 5회, 닭조림 5회, 자계방 4회, 초계탕 4회, 닭만두 3회, 팽계법 3회, 닭전골 2회,별미, 유전계법, 계회 등이 1회씩 기록돼 있다.
증보산림경제에 나온 요리법을 소개하자면 칠향계법(七香鷄法)은 살찐 암탉을 털을 뽑아 깨끗이 씻어내고 아래쪽의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내고, 별도로 물에 삶아 쓴맛을 없앤 도라지 한 사발과 생강 4~5조각, 파 한 줌, 천초 한 줌, 청장 한 종지, 초와 기름 각 반 종지 등 이상 7가지 양념을 버무려 닭의 뱃속에 넣는다. 만일 양념이 남으면 함께 사기나 질항아리 안에 넣은 다음 기름종이로 그 주둥이를 봉하고 또 사기접시로 덮어 솥에 넣고서 중탕을 하여 익히는 요리법이다.
적계법(炙鷄法)은 살찐 닭을 깃털을 뽑아내되 끓는 물을 사용하지 말고 손으로 깨끗이 뽑아내고 아래쪽의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낸 다음, 깨끗이 씻어 청장과 참기름 약간을 닭의 뱃속에 넣고 배를 가른 구멍을 봉한다. 눅눅한 볏짚으로 닭의 사면을 통째로 칭칭 감아 몇 겹으로 묶고 나서 물에 잠깐 담갔다가 꺼내어(또 다른 법은 진흙으로 바른다) 모닥불 속에 묻어 두어 한 시간쯤 지나면 꺼내는데 볏짚은 타도 상관없다. 볏짚을 벗겨 내고 재를 털어서 손으로 살점을 뜯어 소금에 찍어 먹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워 먹으려면 반드시 기름과 장을 살짝만 바르고 잠깐 구워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오래 구우면 도리어 맛을 잃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좀 더 다양하게, 그리고 맛있게
집에서 손쉽게 기를 수 있는 닭은 어쩌면 서민, 양반 모두 좋아하는 육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 시대 조리서에 등장하는 빈도로 보았을 때 돼지고기에 절대 밀리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닭요리는 한 마리를 통째로 먹었기에 닭을 이용한 음식에 통닭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렇다 보니 부위별 요리가 발달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닭고기를 과거에도 근대에서도 현대에 들어와서도 다양하게 맛있게 즐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OECD 국가 중에서도 닭고기 소비량은 낮은 편이다.
여기에 닭을 통째로 먹지만 닭 다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닭 다리 수입이 다른 부위보다 10배 이상 많다. 어느 부위가 더 맛있고 영양학적 가치가 높다가 아니라 다양한 닭고기를 즐기는 방법을 어디에서 찾을까 고민하다가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먹었는지를 살펴보니 현대인들보다 더 다양하게 맛있게 닭고기를 즐겼다. 우리도 좀 더 다양하게 닭고기를 즐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정은정, 대한민국 치킨전, 따비, 2014.
국경덕, 조리 관련 문헌에 수록된 가금류 조리법의 변화에 관한 고찰, 우송대 경영대학원 석사논문.
김태공, 닭요리의 조리사적 고찰, 상명대학교 가정문화연구소,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