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크랜베리를 좀 챙겨 먹으면 나을까요?"
"약 하나, 음식 하나 먹고 병 나을 생각 말아요. 그런 건 없어. 평소에 스트레스 관리 잘하고 피곤하게 다니지 말고, 그리고 몸의 병나는 건 신경이 예민해서 그래. 좀 무던~하게 사세요 이제 뭐 스무 살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한창 예민할 시기도 아니고, 누굴 만나더라도 너무 신경 많이 쓰지 말고...."
내 인생의 적, 방광염이 다시 찾아왔다. 지방에 있는 바람에 부랴부랴 검색해서 조그맣고 오래된 비뇨기과를 찾아갔는데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이나 경력이 많은 의사를 좀 신뢰하는 편이라 그분의 말씀을 새겨듣기로 했다. 젊은 사람이 그랬다면 조금 화가 날 수도 있었을까 했는데, 이 또한 내가 예민해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니 할 말이 없다. 이래서 충고라는 건 지긋한 어른이나 선배한테 들어야 하나보다.
센 주사 두방을 맞아 얼얼한 엉덩이를 만지며 약국에 가면서 생각했다. 맞다. 나는 확실히 예민하다. 언제부터 예민했는지 잘 모르겠다. 20대 때의 나는 분명히 아무거나 잘 먹고 어디 던져놔도 잘 자는 그런 아이였던 것 같는데. 인도 여행할 땐 우리나라 수용소 독방보다 못한 것 같은 싸구려 숙소에서 자기도 하고, 호주에선 그냥 길바닥에 퍽퍽 퍼질러 앉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는 내가 좋았다. 갇혀 살다가 자유를 찾은 것 같은 느낌, 이 자유가 주는 해방감이 얼마나 좋았는지 영원히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이 나를 조금 무던하게 만들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는 무던했던 적이 별로 없다. 특히나 2000년대 회사 분위기는 눈치 없이 다니긴 힘든 곳이었다. 상사에게 골방으로 불려 들어가서 혼난 다음에 "너 처신 잘해. 라인 잘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것도 전혀 그런 말을 입에 올릴 거라 생각하지 못한 캐릭터의 사람에게. 나는 그 혼냄이 내가 잘못한 것보다 내가 엮였던 어떤 일과 관련해 그 사람의 자존심에 난 상처에 대한 화풀이가 더 컸다는 걸 그때도 알았고 지금도 알고 있다.
그렇게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눈이 뒤통수에도 달리게 된다. 상대방의 숨소리만 들어도 기분을 알 것 같은 느낌. 아침 인사만 건네도 '나 오늘 힘든 하루겠구나'가 느껴지기도 한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사무실이지만 그 위쪽 공기의 흐름을 자세히 보면 갈래갈래 갈래들이 보이기도 한다. 나의 반전 상사가 말한 '잘 타야 하는 줄' 들이 바로 저런 거였겠지.
회사생활은 누구에게나 다 가혹하고 비슷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의 성격 문제다. 그 많은 정치와 싸움, 시기와 질투와 여러 '라인' 들이 난무하는 공간에서도 편안하게 낮잠을 자거나 인터넷쇼핑을 하거나 심지어 한두 시간 사우나를 갔다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무던이' 들은 늘 얼굴에 빛이 돌았다. 그리고 대체로 유머러스하고 주변인들에게 친절하며 상사에겐 고분고분하다.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 그러나 일에 지주 펑크를 낸다.
그 펑크를 메꾸는 사람들은 나 같은 '예민이' 들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라도 놓칠세라 모든 디테일을 부여잡고 끝까지 씨름하며 끙끙대는 타입이다. 그 덕분에 일을 꼼꼼하게 처리한다. 모든 상황에 대해 플랜 b를 생각해 두고 많이 가면 c나 d까지도 생각한다. 그러느라 사람들과 친분 쌓기는 제쳐두고 일에 올인한다. 당연히 인기는 없다. 그리고 속으로 '무던이' 들을 질투하고 욕한다. 솔직히 말하면 질투하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냥 두배로 욕을 했다. 무능하면서 폼만 잡고 다닌다고. 그것이 나의 작은 낙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십 년 쌓인 내 습관은 예민한 성격과 합체되어 일상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아무 데서나 잘 수 없게 되었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온몸의 털 끝에 촉수라도 달아놓은 듯 주변의 모든 정보를 느낀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의 얼굴표정과 분위기, 목소리, 걸음걸이 모든 것이 레이더망에 걸려 나의 뇌를 괴롭힌다. 그러고 그 결과물들은 그 사람과 헤어진 후에도 머릿속에 남아 되새김질된다. 내가 인식하든 하지 않든 내 몸의 세포들은 그렇게 일을 한다.
그래서 차라리 위험지역에 가는 길목을 막는 방법을 택했다. 외출도 줄이고 사람들과의 만남의 접점을 줄이기로 했다. 나와 내 주변의 무생물들과 어울리는 것이 훨씬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대상들, 그저 전기만 주면 움직이는 노트북과 핸드폰, 전기조차 필요 없는 책과 침대, 목공, 기타, 커피, 요리와 맛있는 음식...
이 사랑스러운 무생물들에 둘러싸여 힐링하고 싶다. 예민이를 버리고 '무던이' 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