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 인간관계

by 우주속의 먼지

냉장고를 오랜만에 정리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오래된) 음식들이 나온다. 물론 내가 모르던 음식 중 어떤 것은 이미 음식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나는 낭비되는 음식에 민감하다. 배달음식을 거의 안 먹기도 하지만 어쩌다 배달을 시키면 뜯고 일단 집에 있는 반찬통에 잘 소분해 둔다. 그러면 1인분이 3인분 정도 되면서 적당히 과식 없이, 또 남김없이 먹을 수 있다. 짬뽕 같은 건 재미있다. 첫날은 짬뽕이었다가 둘째 날엔 짬뽕밥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날엔 짬뽕찌개가 된다.


외출할 때마다 뭔가를 먹고 남기고 올 걸 대비하여 작은 밀폐용기를 늘 가방에 넣고 다닌다. 그 안에 담아 오는 것들은 탕수육 3개나 피자 2조각, 아니면 남은 반찬을 다 담아 올 때도 있고. 크기는 작아도 아주 유용하다.


음식에 대한 집착이 이 정도인 나에게 냉장고 속에 존재도 모른 채 사라져 간 음식들의 흔적을 보는 게 얼마나 속이 상한지 모르겠다. 이렇게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인가. 늘 머릿속에 냉장고 모든 칸을 넣어두고 먹어야 할 음식의 우선순위를 정해두고 사느라 피곤하지만 보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나 빈틈은 가득했다.


냉장고 속 음식의 소비사이클 중 가장 간과한 부분은 '간장이나 식초로 절여진 음식'을 너무 믿고 꺼내보지 않은 것이다. 마치 냉장고 속에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 저 안쪽 구석에 모셔두었다. 언젠가부터 그것들은 그냥 냉장고 문을 열 때 뒷배경처럼 익숙해졌다.


그 절인 음식들이 마치 연락하지도 않고 평소에 별로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친구'라는 카테고리로 묶여 있는, 내 과거부터 쌓인 인간관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식초와 간장을 무한정 믿듯이 우리는 어떤 테두리(학교/회사/동아리 등)로 묶여 있는 사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평소에 무심하게 있어도 될 것 같은 그런 사이들.


그러나 믿었던 간장과 식초 속 음식들은 생각대로 모두 온전하지는 않았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너무 시큼하거나 너무 짜서, 혹은 질감이 너무 물러져서 먹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무심했던 내 주변 사람들도 이미 이 음식들처럼 나에게 존재하는 것일지도.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 - 모든 생물과 무생물 - 은 내가 돌보고 애정을 가져야 온전할 수 있고 그 관계 또한 의미 있게 이어지는 것임을 새삼스레 깨닫고, 살아남은 절임음식들의 위치를 앞으로 바꾸었다. 끼니마다 조금씩 꺼내먹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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