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소모되는 소모품

휴지, 비누, 만년필

by 우주속의 먼지

나는 소모품이라면 흔적이 남지 않는 물건들을 좋아한다.


내 주변 생활에서 쉽게 쓰이는 물건들 중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두루마리 휴지다. 물론 휴지를 다 쓰고 나면 동그란 심지가 남긴 하지만 다른 물건들에 비하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도 볼 수 있다. 각티슈와 비교해도 각티슈는 다 쓰고 나면 종이각과 비닐이 남는다. 그것도 분리수거 때문에 각 속에 손을 구겨 넣어서 비닐을 떼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 비닐이 정말로 분리수거가 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파트에 포클레인이 오는 날이면 이 박스, 저 박스 마구마구 끌어다가 한꺼번에 섞는 느낌인데, 그래도 잘 되고 있다고 믿어야겠다. 그렇게 믿으며 나는 각티슈의 비닐과 페트병의 비닐을 꼼꼼히 분리한다.

두루마리 휴지는 그 몸 자체로 지탱하는 능력이 있는 물건이다. 생각해보면 스스로 지탱할 수 없어 늘 통이나 케이스에 담겨 있는 것들이 많고 그런 것들이 현재 지구 상에 넘쳐나는 플라스틱과 비닐에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휴지는 생각해보면 놀랍다. 종잇장처럼 얇은 단면이 모아져서 그 휴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휴지 한 장은 절대 옆으로 세울 수 없다. 세우기는커녕 손을 놓자마자 날아가거나 힘없이 바닥에 누울 것이다. 열 장도 같을 것이다. 수백 장이 촘촘히 붙어서 서로 힘을 나누면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원형으로 서 있다. 남극의 펭귄들이 허들링 하듯 중심을 향해 서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남극의 펭귄들도 각티슈보단 두루마리를 좋아할 것이다.


흔적이 남지 않는 것들 중 대표적으로는 비누가 있다. 아 물론 비누거품과 비누 성분이 물에 녹아서 하수구로 나가서 정수되거나 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흔적은 그런 과학적이거나 물리적인 부분을 제치고 1차적인 흔적, 예를 들어 같은 기능을 하는 손세정제 등과 비교해 얘기하는 것이라고 해두겠다. 비누도 참 신기한 발명품이다. 각 비누마다 고유의 향이 있고 모양이 있다. 그리고 비누칠을 하기 위해 손으로 한번 쓱 휘감을 때 느껴지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은 손이 깨끗해지기도 전에 기분을 깨끗하게 해 준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남의 집, 혹은 공공시설이 아닌 일반 실내 화장실에서도 비누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비누가 있어야 할 곳에 대부분 손세정제가 있고, 비누가 있어야 할 곳에 대부분 바디워시가 있다.

손세정제가 훨씬 위생적이라고 해서 다들 그것을 쓰는 모양이다. 손세정제에서 나는 거품과 향은 확실히 비누와는 다르다. 왠지 모르게 더 고급스러운 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름 브랜드가 유명한 곳의 세정제는 아로마 향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리필되어 쓰이는 것이 아닌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펌핑이 끝난 세정제의 빈 플라스틱 통은 버려지겠지. 그러고 나서 또 바로 새 플라스틱에 담긴 새 세정제가 오겠지. 일주일에 한 번 욕조에 물을 받을 때만 쓰는 것도 아닌 매일매일 쓰는 손 세정제는 얼마나 빨리 없어질까. 그러면 얼마나 많은 집에서 얼마나 많은 손세정제 통이 버려질까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지며 저 푸른 바다에서 플라스틱을 먹고 죽은 고래들이 생각난다.


비슷한 맥락으로 오래오래 쓰이는 물건에 대한 애정도 높은데 대표적으로 만년필이 있다. 만년필의 매력은 아무 에너지도 먹지 않으면서 그 생명력이 긴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는 데 쓰는 물건들 중에 오래 쓰는 물건들은 많은 경우에 에너지를 먹는다. 모든 전자제품이 그렇고, 어떤 식으로든 충전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그렇다. 그런데 만년필이 먹는 건 잉크가 다다. 때가 되면 물고기 밥을 주듯이 때가 되면 잉크를 한 번씩만 넣어주면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가 있다. 그리고 만년필은 단순하다. 잉크를 넣은 만큼 쓰다가 잉크가 없어지면 펜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다시 잉크를 넣어서 펜을 나오게 하면 되는 것이다. 배고프다고 하면 밥을 주고 그러면 빵긋 웃어주는 아이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볼펜은 도대체 똥이 언제 무슨 맥락에서 나오는지, 또 갑자기 왜 잘 안 써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볼펜은 머릿속이 복잡한 사춘기 소년소녀 같다. 새 펜이라고 좋고 헌 펜이라고 잘 안 써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가 잘 안 써지는 펜을 묵혀두면 한 2년 뒤엔 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 펜은 당최 분리수거도 안된다. 안에 스프링을 빼야 하나 -까지 생각해 본 적은 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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