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여자

힘센 남자

by 우주속의 먼지

힘센 여자에 대한 로망은 어릴 때부터 있었다.


누구나 가졌을 법한 어린 시절의 정의감 가득한 상상력 끝엔 늘 내가 힘센 사람이 되어 못된 놈들을 두들겨 패는 결론을 내곤 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캐릭터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소머즈였다. 그녀는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릴 수 있고 아주 멀리서 이야기하는 것도 들을 수 있고 오른손으로는 뭐든 휘게 할 수 있었다. 큰 사고가 나서 몸이 망가져버린 끝에 두 다리와 귀, 그리고 오른손을 인조인간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예쁜 건 덤.

나는 그녀가 무적처럼 악한 자들을 무찌를 때, 남자들이 악당을 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품격을 느꼈다. 슈퍼히어로들처럼 오버하지도 않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보여주기 식의 액션이나 허세 따위도 없다. 그냥 우연히 갖게 된 자신의 능력을 딱 필요한 곳에 그렇게 티 나지 않게 쓰고, 이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간다. 아직도 그녀가 힘을 쓰기 직전에 ‘우두두두’ 하는 효과음이 생생하다. 그러고 나면 바로 슬로 모션으로 그녀의 액션이 보인다. ‘우두두두’ 하는 소리가 들릴 때면 내 심장도 ‘두근두근’ 하곤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못된 아이들(남자)를 보게 되었고, 나에겐 소머즈의 힘이 필요했는데 오히려 남자들이 얼마나 힘이 센 존재인지를 깨닫는 일만 많아지게 되었다. 달리기도 훨씬 잘해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고, 팔다리를 쓰게 되는 날은 정말 타격이 컸다. 그러면 말로라도 이겨야 하는데 이건 뭐, 욕을 할 수가 있어야지. 남자아이들은 욕과 힘으로 무장한 무적이었다. 그중 어떤 아이는 정말 신박한 욕을 잘하기도 했다. 어디서 배우고 오나 싶을 정도로 듣고 나면 감탄까지 나오게 하는 그런 욕들. 나도 그렇게 못된 말과 욕이라고 했다면 좋았을까. 그러기엔 너무 순진했었나 보다.


청소년기에는 여자 학교를 다니느라 그 힘센 존재들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사춘기 때 로맨스라도 있었다면 좀 덜 미워했을까.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스무 살이 넘어 드디어 성인이 된 남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 거슬렸던 존재는 남자보단 오히려 여자인 것이 반전이었다. 상당수의 여자들(대학생)들이 정말 예쁘고도 참하게 등장했다. 구두를 신고 정장 바지를 입고 백팩은 작은 걸 매고서 커다란 전공책은 앞으로 들고 다니는 이상한 모습들을 하고. 남자들은 무겁지도 않은 여자들의 가방을 들어주면서 다니기도 했다. 힘은 필요할 때 쓰여야 멋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 모습이 하나도 멋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오기였는지 나는 내가 나약해 보이는 설정이 싫었다. 뭐 그런 사소한 일에 거창하게 ‘나약’이라고 까지 붙일 일도 없었지만. 어떻게 보면 약간의 삐딱선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옆을 걷는 남자들은 내 짐을 들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십 대 초반 청춘남녀들은 그렇게라도 서로에게 어필하려고 서로가 가진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젠틀하게 자진해서 짐을 들어주던 20대 남자들은 회사원이 되면 조금 더 현실적인 인간이 된다. 쓸 데 없이 힘자랑하는 일은 줄고, 오히려 힘을 써야 하는 곳에 남자라는 이유로 동원되는 것을 불평등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 가방과 내 짐은 내가 충분히 들 수 있지만 정수기 물은 혼자 들 수 없어서 늘 남자에게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그뿐인가. 나무는 들 수 있어도 쇳덩어리가 가득한 박스는 들 수 없고, 작은 사다리는 들 수 있지만 큰 사다리는 들 수 없다. 그건 남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맘이 편하지 않았다. 왜 나는 못할까. 왜 나는 저들의 도움 없이는 안될까. 남자 없이 살고 싶지만 단 하나, 나에게 없는 힘을 그들이 가진 것이 오히려 나에겐 불평등하게 느껴지곤 했다. 매번 나는 고맙다고 하고 그들은 생색을 낸다. 정말 나에게 소머즈의 팔만 있었다면 이럴 일은 없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 ‘힘’ 이란 건 노력에 대한 결과가 아닌데, 왜 나는 빚지는 기분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그만한 ‘힘’ 이 없는 것도 내 잘못이라고 하긴 어렵다. 마른 멸치 같은 남자와 돼지처럼 살찐 여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여자와 남자의 근육과 가진 에너지의 차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미리 가진 것으로 베풀고 감사를 받을 수 있다면 그건 내 머리카락이 될 수도 있고 얼굴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다만 그들의 쓰임이 없을 뿐이다. 만약 인간이라는 동물이 코가 가려울 때 긴 머리카락으로 코를 때려서 가려움이 없어질 수 있는 성질이 있다면, 남자가 코가 가려울 때마다 나는 머리카락을 갖다 대서 그걸 해결해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일상생활에서 남자의 힘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다. 물론 회사에서 정수기 물 갈기 같은 것들도 해당되지만 집이라면 요리와 부엌일이야말로 남자들에게 적합한 영역이라 생각한다. 일단 식기와 냄비들, 프라이팬 등이 무겁다. 한 손으로 들고 뭘 할라치면 팔에 무리가 온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볶음밥을 파도처럼 위로 쳐올리거나, 김치전을 잘 뒤집으려고 프라이팬을 손목 스냅으로 휘두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칼질. 무언가를 베고 썰고 하는 것도 굳이 따지자면 남자들의 DNA에 있는 거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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