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밸런타인데이 새벽에 돌아가셨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문일 정도로 몸이 많이 망가져서 아빠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돌아가시는 게 나았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이 슬프지 않았다. 슬픈 건 아빠가 아픈 몸으로 고생한 지난 7년이었지. 내가 고향에 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엄마의 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가 함께 왔다. 돌아가시는 순간이 생각보다 조용했다고 한다. 평소대로 석션을 하다가 석션해도 산소포화도가 안 올라가다가 갑자기 기계의 모든 수치가 0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 순간 간병인 혼자 있었으면 우리 가족 모두의 마음의 짐이 평생 있었을 텐데 그 또한 다행이었다. 이전 간병인이 그만둬주어서 엄마가 옆에 계셨다. 어느 밤 아빠가 열이 크게 나고 경련이 나고 밤새 난리 나는 바람에 잘하던 간병인이 부담스럽다고 떠났다. 엄마가 내 말을 듣고 또 다른 간병인을 썼으면 큰일 날 뻔했다. 뭐 큰일이 나진 않았겠지만 나의 판단 미스로 온 가족이 마음의 짐을 질 뻔했다. 엄마를 데려오고 우리도 준비하라는 아빠의 신호였을까.
아빠의 장례를 치룰 때도 많이 울지 않았다. 멀리서 찾아주는 친구들과 손님들이 고마워서 웃고, 음식이 맛있어서 웃고, 혼자 온 친구가 절 하는 법을 몰라 실수하는 걸 보며 웃었다. 어릴 적 키워준 이모가 왔을 때 아기처럼, 아빠를 오랫동안 보살폈던 요양사가 이미 흠뻑 젖은 얼굴로 들어왔을 때, 그리고 입관할 때 그렇게 세 번 크게 울었던 것 같다. 입관할 때 아빠의 얼굴이 내 얼굴을 갖다 댔다. 차갑게 식어서 사람 같지 않았지만 아빠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빠 모양의 인형 같기도 했다. 피부가 좋았다. 문득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에도 따뜻하던 몸이 기억났다. 심장으로 데워진 피가 천천히 식는 상상을 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보던 책에 있던 동그란 모양의 적혈구가 생각났다. 그 아이들이 그렇게 온몸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얼마나 신기했던지. 그 동그란 적혈구의 이미지를 본 뒤로 나는 내 핏줄 속에 마치 동전이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아빠 핏줄 속 동전들은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펌프질이 멈추어 당황했을까? 그냥 그 자리에 둥둥 뜬 채 천천히 식어갔겠지? 자신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작년 8월 집에서 요양하던 아빠가 병원에 실려갔을 때, 중환자실에서 계속 연락이 왔다. 연명치료 할 거냐고 물어봐서 안 한다고 했다. 아빠가 확실히 위독함을 실감했다. 하루에 한 번, 10분 정도만 가능한 면회를 갔다 오며 생사만 확인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에 전화가 또 와서 아빠를 보러 오라는 것이다. 아까 봤다고 했더니,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으니 그냥 와서 보라고 한다.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몸살이 났다. 이상하게도 아빠와 연결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빠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뜨고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을 때가 있다. 아빠가 말씀을 못하실 때 모두가 ‘못’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안’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지금 내 몸의 상태가 치욕스럽고 너무 속상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중환자실에 가서 아빠에게 펑펑 울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빠는 여전히 눈을 뜨고 나를 봤다.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전화가 올까 봐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고 며칠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아빠는 그때 고비를 넘기고 일반병실로 옮겨 와 입원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아빠의 평소 지론을 너무나 잘 아는 우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연명치료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 연명치료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저 자가호흡이 안 되는 사람을 산소호흡기를 끼워두고 살려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아빠는 수년 전 연하장애가 온 뒤 이미 위를 뚫었고, 이번 위기를 넘기며 의사의 권유로 기관삽관을 했다. '환자가 더 편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뚫린 목으로 고온 고압 고습의 산소가 계속 들어가 폐 속의 가래를 녹이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말라버린 살에는 핏줄이 안 보여서 약물은 몸속 깊은 곳에 찔러 넣는 카데터 시술을 정기적으로 받아야 했다. 왼쪽과 오른쪽 쇄골 밑이 번갈아 주삿바늘에 혹사당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보던 아유슈비츠의 유대인, 딱 그 몸이었다. 그 상태로 온 몸이 휜 채로 굳어버렸다. 피를 뽑으러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내 피를 주고 싶었다. 병원에 실려와 며칠간 금식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나, 또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 병원을 미워할 수도 없었다. 누워있으니 당연히 소변줄은 껴있었다. 바이탈을 체크해야 하니 심장과 배, 손가락에 이런저런 측정장치가 달려있었다. 그나마 이 장치들은 살을 뚫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 괜찮았다. 우리와 소통은 안된 지 오래고, 돌아기시기 전 몇 달간은 눈을 못 뜨셨다. 눈 주변 근육까지 모두 풀렸던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왼쪽 눈만 풀린 상태라, 밤에 테이프를 붙여 눈을 감겼는데 이젠 양쪽 눈 모두가 그렇게 되었다.
아빠는 사람이 천천히 꾸준히 안 좋아지는 모든 과정을 보여줬다. 연명치료는 거부했지만 그 경계에 있을만한 모든 것을 다 했다. 어쩌면 위에 구멍을 꿇는 것부터 일종의 연명치료 아니었을까. 우리의 욕심으로 억지로 살아계시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몸에 매달린 줄과 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욕창, 뼈만 남은 몸, 그리고 유일하게 주사를 겨우 꽂을 수 있을 곳은 발밖에 안 남아서 주삿바늘로 엉망진창이 된 퉁퉁 부은 발을 보면 죄책감이 들었다. 아빠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빠 자신인가 우리인가. 그나마도 살아계시다는 걸 알만한 것은 스크린에 뜬 심박수와 산소포화도와 호흡수와 혈압, 그리고 기저귀로 나오는 대변과 소변줄로 나오는 소변이 다였다. 그러나 돌아가시고 알았다. 아빠가 살아있던 가장 큰 증거는 아빠의 체온이었다는 것을.
영정 사진으로는 몇 안 되는 아빠의 웃는 얼굴 사진을 골랐다. 단독으로 찍힌 것이 없어서 주변 배경과 우리를 지우고, 입고 계시던 병원복은 멀끔한 양복으로 바뀌었다. 정년퇴직하고 5년간 행복한 생활을 하고 7년간 침대에 누워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행복한 5년이 최소한 7년보다는 길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엄한 아버지, 철없는 동생들 사이에서 집안의 가장으로 호랑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빠는 일을 놓은 다음에야 본연의 선함과 다정함이 배어 나왔다. 그 동생들은 감히 무너지고 다친 호랑이를 볼 용기가 안 났는지 아버지 같은 형님의 병문안을 거의 오지 않았다. 한 때 나의 원수, 미움의 대상, 그러나 크면서 이해하게 된 인간으로서의 아빠, 선하고 깨끗함, 나에게 많은 재능과 취향을 물려준 사람, 많지 않은 교사 월급으로 평생 어머니에게 많은 액수의 용돈을 드리면서도 자식들 서울 보내며 고생 안 시킨 모범아빠이자 아들. 본인을 둘러싼 멀고 가까웠던 모든 친척들의 유일한 연락책, 집안의 기둥...
우리에게 많이 웃어주거나 우리를 안아주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다. 아빠가 다정한 아빠였다면 나는 지금 못 견디었을 것이다.
아빠 없이 내가 괜찮을지 생각했다. 같이 산 날보다 떨어져 산 날이 더 많다. 아빠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산다면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까. 학교 다닐 때 ‘사춘기’에 대해 배웠다. 질풍노도의 시기,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나는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생각한다고들 한다. 내가 죽은 이후의 세상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몰라서 답답했다. 나는 그 사춘기와 그 현상이 교과서에 등장할 때 좀 더 깊숙하게 그에 대해 논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그냥 여느 다른 교과서 속 내용처럼 단편적인 지식처럼 두세 줄로만 적혀 있었다. 그렇게만 다루기엔 너무 거대한 주제라고 늘 생각했다. 내가 없는데 내가 왜 생각을 할까. 내가 없더라도 세상은 존재하겠지만 나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의 모순속으로 더 들어가보고 싶었다. 빅뱅 이전에 뭐가 있었을까- 와 같은 것 아닐까. 나와 유전자로 연결된 아빠에 빙의하고 싶었다. 아빠가 나라면, 내가 죽어 없어진 세상은 지금이다. 비록 내가 생각하지 못하지만 내가 있던 세상은 그대로고, 사람들이 나를 여전히 생각하며 그 힘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 내가 느끼거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강력한 바람이 결국엔 종교로 모아지는 걸까. 종교가 없다면 영혼도 믿지 않는 걸까? 귀신을 믿지 않으면 영혼도 믿지 않는 걸까?
아빠가 위독해지신 후 돌아가시기 전 몇 달 사이에 참 많은 사건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예고도 없이, 이별할 준비도 없이 한날 한순간에 사라졌다. 비행기가 추락하여 가족단위로 혹은 친구들끼리 여행 갔다 오던 수십 명이 죽었고, 차량이 돌진하여 회식 후 길에서 커피 마시던 누군가의 직장동료들이 그대로 사라졌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 원주까지 찾아와서 아빠를 병문안했던 정정하시던 분이 먼저 돌아가셨다. 건강한 아버지들을 둔 친구들을 부러워한 게 엊그젠 같은데 그 두 분의 아버지가 먼저 차례로 돌아가셨다. 누군가의 남편은 운동하러 갔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이송되다 돌아가셨다.
아빠가 위독해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분위기였던 작년 8월, 장지를 미리 보고 왔을 때 위치가 맨 아래쪽이라 마음에 걸렸다. 지금 돌아가시면 바닥칸에 들어가셔야 하니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거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아빠는 버티시고 해를 넘겨 2월에 납골당에 입주하시게 되었다. 아빠를 모셔둔 다음 갑자기 생각나서 작년 8월에 있던 자리에 가보니 8월 며칠을 시작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쭉 계셨다. 그 덕에 아빠는 맨 아래도 맨 위도 아닌,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 그래도 그나마 적당한 높이에 당첨될 수 있었다. 그분들께 감사해야 할지, 애도룰 표해야 할지. 그분들도 그 자리 때문에 걱정했을까?
아빠의 자리는 햇볕이 적당히 들어오고, 풍경도 꽉 막히지 않은 괜찮은 곳이다. 올 겨울 유난히 추웠던 며칠 중에 따뜻했던 3일 동안 아빠 3일장을 치렀다. 추위를 너무 싫어하던 아빠의 뜻이었을까. 평소에는 지방이든 가끔은 해외로도 바쁘게 다니는 내가 확실히 한가한 2월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아빠의 몸을 보고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일을 다했고 아빠도 버틸 때까지 버텼다고, 모두가 수고했고 이제 다했다고 느꼈을 때 돌아가셨다. 이 모든 것을 조합하면 아빠는 의식이 없었더라도 영혼이 있었고 뭔가의 힘이 있었다고 느껴진다. 그렇다면 아빠가 죽은 뒤의 세상도 영혼의 힘으로 조금은 느끼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아빠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또 아빠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잘 버티며 살아가는 걸 알고 느낄 수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죽음 이후는 그런 것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