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사랑 006

백중 #6 : 산왕대신

by 베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버렸구나.

생사의 간극에 서 있으리라 여겼는데, 이미 저쪽으로 간 거였어.

비극을, 막지 못했구나.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은현에게, 소년의 영이 조심스레 다가섰다.


[고마워요.]


“…무엇이 고맙다는 말인가요?”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도 절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서 환한 빛과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어요. 그렇게.. 누나의 목소리를 따라 왔어요.]


“…잘 오셨어요. 뭔가 할 말이 있나요?“


부탁을 들어주겠노라는 은현의 태도에, 소년의 영은 망자의 그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저의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전해주실 수 있죠?]


살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면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았음직한, 맑은 소년이었다. 미어지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다스리며 은현은 대답했다.


”꼭 전할게요.“


신녀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소년은 갑자기 시커먼 안색으로 돌변하고선 남은 용건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랑 같이 연습하던 동료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무엇을..?“


[도망쳐.]


그 말을 뱉은 소년도, 듣고 있던 동자도 신녀도. 모두 한동안 얼어붙다시피 제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라는 말인가요?”


한참만에 정적을 깨고 은현이 물었다.


[그… 남자.]


소년은 떠올리기가 몹시 괴롭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최후의 사념을 끌어모아 형체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실루엣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내가 복수 해줄테니 말해요. 그 남자가 누구죠?”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려면 몸을 두 번 스캔하고 들어가야 해요. 그리고… 부름 받기 며칠 전부터 보내준 약을 먹으라고 하는데…그걸 절대 먹으면 안되요.]


두상을 양손가락으로 쥐어뜯듯 감싸쥔 소년은 돌연 자리에 주저 앉더니 고개를 양 무릎 사이로 처박았다.

[계속 와인을 줘요… 그건 그냥 와인이 아니에요. 그건… 아.. 책을 펼치고 히브리어를 가르쳐주면서 읽어보라고 시켜요. 시키는 대로 읽으면 안되요… 그건, 오래된 죄악을 기리는 주문…]


돌발 상황은 채 말을 끝마치기 전에 벌어졌다. 선바위 위에 허들링하듯 둘러앉아있던 까마귀 떼가 갑자기 활강하더니 소년의 영체를 번갈아 관통하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자야! 인을 맺고 태을 보신경을 읊어라. 속히!]


소년만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품새로 보아 예삿 까마귀들이 아니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영체의 앞을 막아선 동자는 양손바닥을 맞대고 합장하더니 경면주사 원석을 입 속으로 집어넣어 콰드득 콰드득 씹었다. 귀신이기는 매한가지인 동자 자신에게도 데미지를 주는 행동이었지만 길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동자의 시선은 까마귀 한 마리 한 마리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검붉은 선혈이 낭자하게 번져나가는 입술 사이로 잘게 조각낸 경면주사의 조각들을 퉷,하고 뱉어내자 대부분의 조각이 까마귀의 날개며 몸통이며 다리, 부리 같은 곳들까지 초고속으로 날아가서 박혔다.


고막을 찢어 발길 듯한 괴성을 지르며 까마귀떼는 물러났다.

아주 사라지지는 않고, 고도를 약간 높인채로 은현의 일행을 계속 관찰했다. 지능적이고, 집단적이며 목적성이 다분한 행동 패턴. 일련의 사건들과 관계된,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신통력을 순식간에 소모한 탓인지 동자가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이어, 까마귀들이 꿰뚫고 지나간 소년의 영체가 너덜너덜해지며 연기가 되어 흩어지려는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면서 태을보신경을 읊던 은현은, 염주를 한바퀴 돌릴 때마다 속으로 계속 부르던 그 이름을 크게 외쳤다.


“산신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팥도 소금도 칠성검도 없어 직접 맞서지 못하다니. 비명에 쓰러진 소년을 사후까지 괴롭히는 악질 중의 악질에게 강력히 경고를 해줘야 하건만. 오직 기도에 의존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밀려오고 있는데.


암흑 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이는 주산 바로 아랫 능선. 대나무숲 한가운데 자리한 금형의 바위에서 무언가 하얗고 큼직한 기운이 둥실 솟아오르더니, 증출맥을 타고서 선바위 기도터까지 한 획으로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도깨비불인가.”


읊조리는 은현에게 동자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저건 백호다.]


“백호…?”


[산왕대신을 태운 백호야… 내 이씨 조선시절에 학질로 횡사한 뒤 인간계에서 어느 덧 육백 년을 놀았는데. 이렇게 저 분을 직접 뵙게 될 줄은...]


핏자국을 옷소매로 황급히 훔쳐내며 안절부절하는 동자의 말이, 은현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산신 할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내셨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안이 벙벙해져있는 은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동자는 얼른 엎드리고 고개를 절대 먼저 들지 말 것을 단단히 일렀다. 숨소리조차 내지 말라고. 시키는대로 무릎을 꿇고서 기도터 바닥에 이마를 붙이자 마자,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우당의 기자여. 나를 찾은 이유를 고하라.]


(*기자: 무당을 일컫는 여러 단어 중의 하나)


심지어 나를 알고 계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선 은현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목을 천천히 추켜 세웠다.


붉은 끼가 도는 주홍빛 장삼. 여섯 척 반 정도 되어 보이는 신장. 새햐얗게 센 머리칼과 명치까지 드리운 수염. 키만한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은 여느 산신각에 걸려있던 탱화 속 묘사 그대로였다.


산왕 대신을 내려놓은 백호는 마치 계단이 나 있기라도 한 듯이 하늘위로 겅중겅중 뛰어오르더니, 까마귀떼를 향해 돌진하며 노기 띤 목소리로 포효를 했다. 그러자 소수의 반사신경 빠른 것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개체가 돌처럼 몸이 굳더니 후두둑, 바닥으로 추락했다.


“신령님께 고합니다. 사바세계의 법도가 흐트러지고 만악이 창궐하여, 이 어린 소년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산신은 보았다. 은현의 달싹이는 입술 사이에서 인간의 말과 함께 새어 나오는, 점멸하는 광섬유 같은 에너지의 형태를.


“이 아이가 더는 구천을 떠돌지 아니하고 제 업식에 따라 육도로 들어가 윤회하도록 인도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어느덧 제자리로 돌아온 백호가, 동자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었다. 동자는 즉시 성불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황홀해하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은현의 기운을 자세히 살핀 산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범부와 아라한이 한 몸에 들었으며… 금생에 애정의 겁난을 통과하면 천도로 갈 명이다. 허나……’


[좋은 눈빛이다. 네 할미와 똑같구나.]


은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외할머니가 살아 생전 인왕산 곳곳을 누비고 다니신 건 몰랐던 바가 아니지만, 산신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해주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의... 옛 당주를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오지랖 넓은 것이 아주 빼박았다.]


지병으로 죽기 이틀 전. 난데없는 소리를 뽑아 심금을 울리더니 내친 김에 철야기도를 올리며 자기보다 더 공줄이 센 손녀를 부탁한다고 발원하던 노 만신. 그 꼬장꼬장한 모습이 산왕대신의 기억속에 선했다.


오랜 벗. 신의 길을 가기 전부터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산다람쥐처럼 쏘다니던, 떡잎부터 당돌하던 정금조. 갖은 전란과 민란을 거치며 모두가 참혹하게 굶던 시절에도, 소나무 껍질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무를 타고 멱을 감던 소녀.


신내림을 받기 전부터 방언이 트일 정도로 가물이 센 체질이었다. 명패를 받고 조상이 실리자 마자, 그녀는 횡포를 일삼던 하급 관리를 찾아가 치부를 정확히 틀어쥐고 겁박했다. 이후, 그의 애를 밴 채로 소박맞아 목을 매달려던 가엾은 여종을 일생 편히 먹고살게 해주었던 일은 신령들 사이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깃거리였다.


인간사 희로애락에 초연하고 겁이라곤 없던 정금조가 일생동안 보물로 여겼던 유일한 존재. 손녀의 눈빛 속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노만신의 영기는, 산신의 마음을 잔잔히 흔들었다.


대저 이 땅의 여인네들은. 구제 중생의 일이라면 터럭 한 올 만큼의 두려움도 품지 않는구나. 내가 아끼는 권속 다운 그릇이다.


[들어주마. 너의 이름을 말해 보거라.]


[저는… 유 서준입니다.]


신이 내어준 산삼의 뿌리를 잘근잘근 씹던 소년의 영체가 어느덧 진기를 회복하여 또박또박 대답했다. 산신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엄지와 검지를 부딪혀 파리한 불꽃을 일으켰다. 불씨는 점점 커지더니 성인 두 명을 합쳐 놓은 것 만해졌다. 동자의 허벅다리에 고개를 얹고서 쓰다듬는 손길을 즐기고 있던 백호가 눈을 뜨더니 그 앞으로 다가섰다.


‘이게 도대체 뭐지…?‘


은현은 불꽃 사이에서 보일락 말락 하는 어떤 존재의 발소리를 들었다. 살짝 애가 타는 마음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데, 어느새 이쪽을 내다보고 있던 까맣고 동그란 한 쌍의 눈동자와 서로 시선이 얽혔다.


‘아. 저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