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사랑 005

백중#5 : 돌아가지 못한 자

by 베가






그러면 그는 나를 모른척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망각한 거였구나.


운명이란 잔인하다. 은현은 애먼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아무리 속세의 남자를 품어서는 안되는 몸이라곤 하나. 있었던 사실마저 성하게 간직하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야박하다고.


표면적으로는 그냥 동급생이었지만 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순간들. 상대가 돌직구로 꽂는 시그널들을 애써 못본척 했지만 속으로는 간간 흔들리던, 뜨겁고도 간질간질했던 시간들.


이한의 머릿속에는 그 시절의 내가 없다. 아니, 그 시절 전체가 없다.

그것도 모르고… 생사의 기로를 건너온 사람에게 나 혼자 일방적으로 의미부여하고 있었구나.


당장 다음주부터 매주 만나서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그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지?


[제자야, 네 영기가 어둡고 탁하다. 무슨 일이더냐.]


대신 할머니가 다가와서 심장 차크라를 매만져주시고 등을 쓸어주신 덕분에, 은현은 좋지 않은 에너지장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었다.


감정이 들불처럼 일어날 때엔 그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 객관화해보는 것이 좋다. 마치 나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게릴라성으로 소집된 즉흥 연극을 구경하는 듯이.


은현은 스스로의 내면을 시각화해볼 때 가끔 쥐는 유니버셜 웨이트 타로 덱을 경대의 서랍 안에서 꺼냈다. 여러번 뒤섞고 스프레드 한 뒤, 속으로 이렇게 질문하고 가장 먼저 손이 가는 한 장을 아무렇게나 뽑아 들었다.


‘현재 내 무의식의 상태가 어떤가.‘


쓰리 오브 소드.


심장에 날카로운 칼 세개가 박힌 카드가 나왔다.

딥한 상처와 실연과 트라우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직관적인 카드가 나오자 은현은 허탈한 헛웃음을 쳤다. 이한이 휩쓸고 지나간 열병의 학창시절의 이후, 남자는 수도 없이 접해보았다. 의뢰를 하러 왔다가 고백을 하는 이들은 어디 한 둘이었나.


진도화살과 화개살 그리고 현침살을 두루 가진 은현은, 존재 그 자체로 몽환적이고도 애처로운 매력을 풍겼다. 함초롬한 신의 제자에게 멋 모르고 욕망을 품은 남자들에게, 그 연심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사건 사고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목격한 것은 또 몇 번이었나.


신들이 빚어놓고 채워 놓은 정기는 오직 신의 일을 수행하라고 부여 받은 것.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다.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서도 안 되고, 내가 좋아해서도 안 된다.

끝내 어느 한 쪽은, 부서지고 말테니.



어쨌거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반나절 앞으로 불쑥 다가온 백중 맞이를 해야 한다.

조상의 혼백을 달래고자 49재 기도를 접수한 제가집들을 위해 회향을 마무리 하고, 또한 나의 조상인 외조모를 기리며 각별히 치성을 드려야 한다.


무복에서 외출복으로 순식간에 환복을 한 은현은 작은 백팩안에 쌀과 명태와 초 한자루, 법주와 징을 챙겨 넣었다. 신당문을 잠그고 나와 주차해둔 SUV에 시동을 거는데 어느 틈에 올라 탔는지, 동자가 조수석에 앉아 발끝을 달랑거리며 알은체를 했다.


[이 밤중에 기도터를 가려구? 나도 데려가.]


샐쭉 웃는 동자의 손에는 고가 들려 있었다. 고풀이가 빠지면 기도를 하다 만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었을텐데. 세심한 배려에 고맙다는 뜻으로 은현은 고개를 까딱했다.


[어디로 갈건데?]


보답으로 받은 모래시계 키링을 신기한 듯 위아래로 흔들며 동자가 물었다.


“선바위로 갑니다.“


[아항. 금방이겠네. 노래 그거 틀어줘. 피가 어쩌고 노래.]


동자의 요청대로 플레이리스트에서 피땀눈물이 반복 재생되도록 세팅한 뒤, 시동을 걸었다.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 일생 경복궁 인근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은현의 본향 본산은 인왕산이었다.


대대로 나랏님이 거하시던 곳을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산.

풍수 상으로 좌청룡인 북악산과 쌍벽을 이루는 우백호, 인왕산.

교교한 암반의 영기가 예사롭지 않은 신산에 오를 때마다 은현은 이곳을 돌보는 산신께 성심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평소 소비를 거의 하지 않는데다 운이 좋게도 고택을 물려받았으므로 생활 기반은 안정적으로 다져진 편이었다.

따라서 불려달라던지 명성을 떨치고 싶다던지 현실적인 곤란을 면하고 싶다던지 하는, 사적인 소원을 빌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인연된 모든 이들을 위한 감사와 평화의 기도를 주로 올렸었는데.


두터운 암반으로 조성된 계단을 사뿐히 오르며, 은현은 자신도 모르게 빌기 시작했다.

돌처럼, 바람처럼.

왔다 가는 티조차 내지 않으나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무수한 이름 없는 것들처럼.

이 몸과 마음도 꼭 그렇게만 쓰이기를.


동자는 무표정하게 고바위길을 묵묵히 오르는 제자의 어깨 근처에서 실려가며,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영적인 소명이 젊은 육신의 본능과 호르몬 작용을 이길까?

여태 이겨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미친 케미의, 늑대를 달고 다니며 폭력적일 정도로 잘 생기고 키 크고 떡대 좋은 수컷 아이돌만 딱 피할 수 있다면 말이다.


녀석이 가진 장점은 비단 외모 뿐만이 아니었다.

여태 화우당을 찾아온 인간들 중, 신분을 속이고 살짝 모자란 척 연기를 하던 재벌집 사모 이후. 두 번째로 짙은 부내가 났다.

그리고 놈의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고 있던 엄청난 생명력.

속내가 쉬이 읽히지 않는 회색톤의 아우라까지.

그러다가 퍼뜩, 알아차렸다.


아수라도나 천상도에 거하는 체급 높은 어르신들이, 우리 화우당에 이 세상의 이치와 법도를 한참 넘어서는 부담스러운 자를 하루 아침에 재난처럼 들이미시다니.


업경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 놈은, 인간도에서 윤회한 여느 존재가 아니었다.


천신들이 어떤 이유로 잡아다가 기억을 지우고, 인간도로 추방하면서 사실상 달성 불가능한 복귀 미션을 부여한 팔자였다.


수세기 동안 풍문으로만 듣던 추락 천신의 인장이 놈의 양미간 사이, 제3의 눈 한가운데서 푸른 빛을 발하는 걸 발견한 화우당의 신령들은 질색팔색을 하며 줄행랑을 쳤다.

제가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가엾은 제자를 들쑤시지 않기 위해 최대한 평소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허나, 무릇 삼라만상에 내비치는 일들 중 우연은 없는 법.


그래서 동자는 사실, 제자를 따라 밤마실에 나서기 전 다른 신령들과 내기를 한 터였다.

내기의 주제는 이거였다.

여태 처녀성을 간직한 채로 신의 길 위에서 올곧게만 살아온 우리의 순수하고도 모범적인 제자가.

이계에서 뭐하고 굴러먹었는지 알 길이 전무한, 수상한 놈 하나로 인해 마음을 헝클어트리지 않고 끝끝내 자신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동자는, 가능하다에 걸었다.

아니. 가능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놈의 기분 나쁜 늑대새끼 꼬리에 불을 싸질러 통구이를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제자의 무결함을 보존해줄 생각이었다.


그런 동자의 애끓는 보호본능 따위는 추호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은현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를 모신 국사당에 먼저 들러 간략하게 정성을 들였다. 이윽고 선바위 앞에 도달한 화우당의 신녀는 챙겨온 짐을 정갈히 풀어놓았다.


[휘유- 여기는 언제 와도 영빨 장난 아니다. 용혈이라 그런가봐. 그치? 또 인왕산 할아버지가 천신줄이라 그렇대. …근데 웬 까마귀 떼가 이리 모여있지?]


선바위에서 제일 높고 움푹한 포인트에 운집해있는 시커먼 물상들을 유심히 살피며 동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까마귀들은 작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서 은현이 올리는 기도를 멀뚱히 주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현은 영계와 인간계를 연결하는 통로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제가집의 영령들을 위하여 징을 둥글게 둥글게 쓸며 은은한 음파를 자아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 참 제자야, 우란분경에 금강경까지 하믄 됐지! 경이란 경은 다 욀 셈이야? 지옥문이란 지옥문은 시방 너가 다 열겄다. 슬슬 인시 되기 전에 마무리하구 가자아.]


좀이 쑤시기 시작한 동자가 공물로 가져온 청포도 사탕과 초코파이를 우적거리며 그만 자리를 파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마고 은현이 가부좌를 풀고서 일어서던 찰나.


선바위 근처를 마지막으로 한바퀴 슥 돌아보고 온 동자는, 그새 은현의 등 뒤에 음산하게 달라붙어 있는 영체를 발견하자마자 주머니를 뒤져 잡귀를 쫓는 경면주사 원석을 놈의 면전에다 쏘듯이 던졌다.


그리고 체구를 거대하게 부풀리곤, 귀신들만이 들을 수 있는 음역대 안에서 최고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말마를 질러 은현에게서 그것을 신속히 떼어냈다.


[아무리 날이 날이라지만 더럽고 비천한 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구나. 백중은 죄 없거나 죄를 모두 닦은 영들이 비명에 가느라 치르지 못한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날이다. 신명도 뭣도 아닌 저급한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신의 제자에게 욕을 보여? 내 필히 네 놈이 삼악도 안에서 영겁을 맴돌도록 저주할 터.]


동자가 용솟음치는 분노를 직통으로 내리꽂으려던 그 때.

사태를 좌시하고 있던 은현이 왼손을 들어올려 잔뜩 흥분한 수호신을 만류했다.


[왜 시발, 봐 주긴 왜 봐주는데! 저런거에 한 번 감기면 네가 몇 날 며칠을 못 먹고 앓아눕는 꼴 보는 것두 이젠 못해먹겠다구!]


“무릇 신제자의 쓸모가 무엇입니까. 영이 드나드는 통로 아닙니까. 저 영이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홀로 이 산중에 춥고 무섭고.. 그 와중에 제가 보였고. 그저, 그 뿐이었을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귀신들의 눈에 비추기를, 은현의 육신이 발하는 빛은 다른 어떤 존재들보다 유난히 밝고도 따스했다.


동자에게 선빵을 얻어맞고 잔뜩 움츠린 채로 떨고 있던 영은, 은현의 이야기를 듣고서 안심이 되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룩진 눈물과 수척한 얼굴.


찢어진 티셔츠.


그리고…


[어… 어? 제자야! 이 놈 이거, 아까 그 늑대새끼가 보여준 영상 안에서 맞고 있던! 마.. 맞지?]


“네.. 열다섯살.. ”


은현은 차마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