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사랑 002

백중#2 : 여우, 늑대, 그리고 신녀

by 베가




인간들 사이의 사무치는 마음과 세상에 훤히 드러내지 못할 온갖 사건들은 우연으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전생과 현생과 후생의 업력으로 말미암아 시공을 초월하여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인연들.


서로간에 갚아야 할 몫을 읽어주고, 덜어주고, 씻어주는 신의 일을 집행하다 보면 시간이 멈춘다는 느낌을 받는 것쯤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분명 흔하디 흔한 일이었는데.


화우당 안으로 불쑥 들어온 남자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돌연 혈관 속에서 피가 도는 속도가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느려졌다 빨라졌다를 불규칙하게 반복했다.


일순 머리가 핑 돌고 땅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에 은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내일은 백중날.


일 년에 단 하루, 사바세계와 명부 사이에 나 있는 문이 열리는 날인 만큼 불시에 찾아든 성급한 영가가 자아내는 환상일 수도 있었다.


다른 무당들이 쉬이 풀어내지 못하는 살을 곧잘 해원해준다는 소문이 업계 저변에 알음알음 퍼져있는지라, 도력이 깊은 법사가 기운을 가늠해보러 온 것일 수도.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한참을 정물처럼 서 있던 검은 수트의 남자가 천천히 뒤돌아보자 은현은 오늘 오후 나절에 화경으로 비친 모든 것이 지금의 만남을 예고하는 지기였음을 깨달았다.


반쯤 감겨있던 그의 암청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은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겹겹의 옷으로 감쌌어도 감출 수 없는 떡 벌어진 어깨와 화려한 듯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목구비 너머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특유의 무표정.


어느 곳에다 어떤 모습으로 세워놓아도 홀로 시공간의 엔트로피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강렬한 존재감.


정이한이었다.


잿빛 모질이 여전히 반짝거리는, 제 주인만큼이나 다리가 길쭉한 늑대는 법당 안에 피워놓은 향로와 기도초의 냄새를 킁킁 맡으며 제 딴에는 낯선 장소를 이모저모 탐색하는 중이었다.


휴가를 받은 옷차림의 미군으로 보이던 신장은 보이지 않았다. 상시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보군, 하고 은현은 생각했다.


십 년의 세월이 무상하리만치 길게 이어지는 정적을 깨고 남자는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약을 안하고 왔는데. 지금 영업 하시나요?”


“…!!”


감정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완전히 초면이라는 듯한 말투는 난데없는 등장 만큼이나 은현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한씨… 그렇게 먼저 가버리면 어떻게 해? 한참을 찾았잖아.”


아이돌처럼 이목구비가 강조되는 풀메이크업을 한, 또래의 여자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콧소리를 섞어가며 신당의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얀 실크 블라우스에 검정색 뷔스티에 원피스를 갖추어 입은 그녀는 연베이지색의 스틸레토 슬링백을 입구에 한 짝씩 벗어놓고서 종종걸음을 쳐 이한의 옆구리에 착 붙어섰다.


그녀에게서는 니치 향수 특유의 고급스러우면서도 생기로운 잔향이 배어있었다.

오종종한 이목구비 가운데서도 유독 도톰한 입술이 육감적인, 포토제닉한 미인이었다.


은현은 무언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으로 이한을 가만히 마주보았다.


하지만 이한은 짙은 눈썹산을 한 번 까딱했을 뿐,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화장실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은현은 혼란스러웠다.


나를 못 알아본건가.


하긴, 십 년이라는 세월은 존재를 망각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딱 한 학기를 한 반에서 보낸 정도의 애매한 사이였으니 더욱.


그러면 간판도 없이, 입소문으로만 운영하는 화우당을 왜, 어떻게 알고서 찾아 온걸까.

그리고 이 여자는 누구이며, 둘은 어떤 사이일까.


추론을 할 새도 없이, 여자가 손바닥만한 버킷백을 열더니 지갑 안에서 명함을 두 장 꺼냈다.


[주식회사 프리즘 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 PR팀 한리아 프로]


[주식회사 프리즘 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 Be:siezd 리더 정이한]


“업계 지인 소개로 왔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용하시다고. 잘 부탁드려요.”


나이답지 않은 완숙한 표정.


전통 한복을 마치 런웨이의 테마의상처럼 소화해내는, 170을 넘은 훤칠한 키.

올곧게 세워진 척추에 다부진 자세.

좌우의 대칭이 조화롭게 맞추어진 선이 고운 몸매.

속된 말로, 이런 사행성의 일을 취급 할 것처럼 생기지 않은 귀티가 나는 절제된 몸가짐.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묘한 끌림을 주는, 청초하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얼굴.

그리고 성우처럼 명확한 발음과 카랑카랑한 맑은 쇳소리가 말 끝마다 울리는, 중저음의 근사한 목소리.


불과 오 분 사이에 뜯어본 은현의 됨됨이와 카리스마에 기가 눌린 한리아가 손끝을 미세하게 떨며 명함을 조심조심 건넸다.


덕분에, 은현은 찰나에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결국 이한은, 연예인이 된 거였구나.


인물로야 연예인이 되고도 남을 정도인 건 맞지만 성격상 천상 아웃사이더인 줄 알았는데.

유명세를 타는 직업을 택한 것이 퍽 의외였다.


그것도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할 정도라니.

보통을 넘는 세월을 살아왔겠군, 하고 은현은 생각했다.


매체라는 것은 누군가의 꿈과 도전, 상처와 실패를 번갈아 조명하며 거짓과 과장을 연료삼아 달리게 마련이었다.


오직 진실만이 통하는 신들의 세계에서는 터럭 한 올 만큼도 허락되지 않는 그런 일체의 탁기를 멀리하고자 평소 티비는 물론이고 SNS도 일체 접하지 않던 은현이었기에.

이한이 현재 얼마나 유명해졌고 성공을 한 건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도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니 만큼, 과거의 어느 한 때 누군가에게 집요하게 구애했던 기억 같은 것은까맣게 잊혀졌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나도 그저, 아는 척 할 것 없이 점사를 보러 온 손님으로만 대해주겠다.


가끔 그리워했음이 약점이 되는 것은, 상대도 그 사실을 알고 있거나 여태 서로가 같은 감정일 때에 한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은현은 점사를 보는 전안으로 한리아를 먼저 안내했다.


대지 120평에 건평 50평 규모의 널찍한 화우당에서도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곳,

전안.


벽의 삼면을 둘러가며 비치해둔 고가구들은 세월의 손때가 켜켜이 묻어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그 때, 한리아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자마자 두런거리는 신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곁에 놓여있는 자개 협탁 속, 반쯤 풀린 상투를 틀고서 한 손에는 탁주를 든채 초야에 묻혀 낚시를 하던 강태공이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은현을 향해 투덜거렸다.


{제자야, 제자야! 갑자기 이게 무슨 냄새야. 여우 냄새가 나는데.}


{여우라니? 요즘 인왕산 자락에 무슨 그런 영물 씩이나 있다고. 하도 잡것들이 설치고 다니는 통에 산비둘기에 참개구리 같은 것들도 겨우 붙어있을까 말깐데.}


낚싯 바늘에 코가 꿰여 물위로 딸려 올라오던 팔뚝만한 잉어가 뻐끔대며, 강태공의 말에 대뜸 반대 의견을 표했다.


하지만 강태공이 맞았다.


지금껏 화우당에 합수된 여덟 명의 신들 중, 까다롭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대신 할머니가 한리아의 머리칼을 들추더니 눕혀져 있던 세모진 갈색 귀를 앞으로 잡아당기며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식, 별 건 아니다. 신가물도 아니고. 자기한테 씌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콩팥 근처에 태아령이 하나 웅크리고 있는데, 머리에 피도 안말랐을 때 사고를 쳤었나 보구나. 쯥, 이따 내보내고 나서 쑥이나 좀 태우려무나.}


그러마고 눈짓하고 있는데, 볼일을 마친 이한이 전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보통 화우당에 첫 걸음을 한 인간들은 총천연색의 액자들과 병풍, 화로, 오방기와 방울 같은 무속 세계의 기물에 한참동안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이었다.

지금 한리아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러고 있는 것처럼.


이한은 그렇지 않았다.


십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욕망도 두려움도 없는 눈빛.

쓸데없는 힘을 주지 않았고 한껏 이완되어 있지만, 폐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안광이 여전했다.


그리고 그의 서늘한 두 눈동자는 오직, 경대 앞에 다소곳이 앉아서 풀어헤친 머리칼을 한데 모아 은비녀로 쪽을 지고 있는 은현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또 뭐여? 늑대 아녀! 하, 요것들 봐라. 오늘 아주 제대로 별종들이 납셨잖아?}


구미가 당긴다는 듯 낚싯대를 홀랑 집어 던지고서 잉어는 훠이훠이 방생 해버린 강태공은, 자개 무늬 세상의 바깥으로 뛰쳐나올 기세로 세 사람을 향해 바짝 다가앉더니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좌우로 때록때록 굴렸다.


은현은 눈짓으로 가볍게 주의를 준 뒤, 저 멀리 강남에 소재한 굴지의 엔터사에서 종로구 산골짜기까지 어려운 행차를 한 두 손님을 향해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화우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고민으로 오셨든, 나갈 때는 한결 가벼워지실겁니다. 하면,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을까요.”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한건지.


아예 대답할 생각 자체가 없어보이는 이한의 알쏭달쏭한 시선을 은현은 피하지 않고 물끄러미 되받았다.


그런 두 사람 사이의 기류를 여태 유심히 살피던 한리아가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히죽 웃으며 이렇게 운을 떼었다.



“저희, 궁합 좀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