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 #3. 실종된 케이팝 연습생
궁합이라. 역시 그랬군.
은현은 빠르게 수긍하며 한지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보통 남녀간에 궁합을 함께 보러 왔다는 것은 결혼이나 그에 준하는 미래를 약속했음을 의미한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니 서로간에 정 붙이기 좋았을테고. 남자가 이십대 후반이니 관계의 진전을 보기에 적당한 때이기도 했다.
속은 조금 쓰리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좋은 마음으로 축원을 해주려고 생년월일시를 물어보려고 하는데.
이한의 늑대가 돌연, 한리아의 여우를 향해 이빨을 세우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은현은 관자놀이를 검지 손가락으로 짚으며 들릴 듯 말듯한 한숨을 내뱉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인간들 사이에 이미 애정으로 단단히 엮였는데, 신이나 조상들 사이에 합의를 보지 못하는 케이스가 가장 난제였다.
{이 누나, 웃기는 누나네. 밤마다 몸정을 통하는 아저씨가 따로 있으면서. 쌩 총각이랑 궁합은 왠 궁합?}
신주단지 위에 고이 접어 올려둔, 불사 할머니의 하얀 고깔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오며 동자가 말했다.
{제자님, 이 남자는 이 여자 귀찮아해요. 지금 다른데에 관심이 있어요. 뭔가.. 슬프다는데. 어.. 아니, 제자님이랑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아이 참, 이 남자.. 왜 이렇게 잘 안보이지.}
공양으로 올린 약밤을 꼭꼭 씹으며 관전하던 선녀도 이야기를 거들었다.
원래부터가 미남 손님을 대놓고 편애하는 선녀는, 제 발로 걸어들어온 이한의 아름다운 얼굴과 피지컬을 감상하느라 몹시 만족한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순식간에 적나라한 모든 이면을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고마워 해야할지, 눈치가 없다고 해야할지. 그저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인 신들에게, 은현은 엷은 미소를 띠어보였다.
“헤헤, 농담이야 농담. 이한씨 화난거 아니지?”
싸해진 이한의 분위기에 살짝 주눅이 든 한리아가 입술을 쓰윽 핥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의 일방적인 호감이었나. 이해는 간다. 이토록 수려하게 생긴 만인의 연인을 지근거리에 두고도 연심을 품지 않기란 쉽지 않았을 터.
아니 그것보다.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노라 여겼던 이한이 지금, 여기 이곳에 나타난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신뢰해 마지 않는 신들은 이한에게 호감을 품고 이것저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신녀로서의 직감은, 상대방에게 아무런 기대도 평가도 상상도 하지 말 것을 외치고 있었다.
화우당을 이어받은 뒤로 단 한 차례도 어긴 적 없는 원칙 하나.
이유를 불문하고, 의뢰인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지 말 것.
대상에 대한 분별과 호불호가 생기는 것은 일생일대의 명운을 알고자 점사를 보러 온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저 똑같은 자연물을 보듯이 바라보고, 대국을 하듯이 거리를 유지할 것. 어떤 과거지사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그리 할 것.
그렇게 마음을 비워내고 있었는데.
점상 맞은편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이한이 불쑥 손을 뻗더니 은현이 쥐고 있던 붓을 냅다 움켜 잡았다.
“…?”
“글씨는 제가 받아 쓸테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한은 은현이 미처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한지까지 자기 앞쪽으로 쓰윽 끌어 당겨갔다.
매사에 동의를 구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행동부터 하고 보는, 여전한 습성에 은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존댓말이라니. 그것도 저렇게 나직한 중저음으로.
{노빠꾸네. 맘에 든다. 시상에나, 딴따라라믄서 술 담배도 안하네. 아주 깨끗햐.}
아예 턱받침을 하고서 엎드려 구경하고 있는 강태공의 주변으로 옥토끼와 꽃사슴과 두루미가 하나 둘 모여들더니, 전안을 벗어나 안방에 있는 자개농을 향해 춤을 추듯 흩어졌다.
저 녀석들, 소문을 내러 갔구나.
신들과 신녀 사이에 본디 비밀이란 성립할 수 없는 법이었지만, 확실치도 않은 염문의 뒷수습을 할 생각을 하니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어? 언니! 이 여자 복채를 어마어마하게 가지고 왔는데. 뭘 부탁하려고 이러지?}
동자와 늘상 한 몸처럼 붙어다니는 동녀가 족두리를 한 데 벗어놓고 몸의 크기를 줄이더니 한리아의 가방 속에 들어가서는 크게 외쳤다.
{네 놈들, 왈패들 마냥 체통 없이 굴지 마려무나. 지금부터는 내가 제자를 보필할테니 다들 썩 제 자리로 돌아가거라. 어기면 벌전을 내릴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손님 대하기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던, 호기심 넘치는 어린 신들을 더는 좌시할 수 없었던지. 의대를 갖춰 입고 정좌한 군웅 장군이 호통을 쳤다.
그가 오므린 부채 끝으로 한 번 탁 소리가 나게 바닥을 치자 작게 뭉친 구름이 몰려오더니 동자와 동녀를 잡아채듯 태우곤, 화폭 안쪽 세상의 깊은 곳으로 소실점이 되어 사라졌다.
참으로 언제 보아도 신통한 도술이로구나. 라고 생각하던 은현은 붓을 쥔 이한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를 향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나의 눈에 너의 신장들이 보이듯이 너의 눈에도 나의… 보이는 건가?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이, 그저 팽팽하게 서로를 대치하고 앉은 이한과 은현을 번갈아 관찰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한리아는 마침내 본론을 꺼내놓았다.
“선생님, 사실은… 올 초부터 우리 회사에서 발굴한 연습생들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빠지거나, 갑자기 크게 다친다던지 재능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몇몇은 아예.. 실종되고 있어요. 너무 이상해요. 도와주세요.“
신당을 운영하다 보면, 점을 보러 올 것이 아니라 기관에 수사를 의뢰해야 할 법한 사안을 들고 오는 고객들이 심심찮게 있어 왔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다. 밝은 세상에서 상식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보지 못하니. 구원을 찾아 돌고 돌아 손발이 닳고 닳은 끝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이렇게 점집 투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저, 한대 피워도 되죠?”
한리아는 속이 탄다는 듯 가방 속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은현은 실내에선 금연이라고 주의를 줄까도 생각해봤으나, 가만히 두면 어디까지 하는가 보자 싶어 그대로 두었다.
“아이 참, 라이터를 두고 왔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한리아가 담배를 다시 케이스에 넣으려던 찰나. 제자리에서 위로 크게 솟구친 여우가 전안 가장자리에 쪼로미 켜져있던 기도초 앞으로 달려가더니 캥캥하는 소리를 냈다.
{이런 후안무치를 봤나. 촛불로다가 담뱃불을 삼으라고 이런다. 내 이것들을…..}
붉어진 낯빛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쥔 군웅 장군이 경을 쳤다. 직통으로 내리꽂히는 살기에 몹시 놀란 여우는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한리아의 등 뒤로 얼른 내뺐다.
그 때.
좌불안석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직장 동료를 잠시 지켜보던 이한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이어, 불씨를 댕기더니 그녀의 코 앞으로 내밀었다.
기대 밖의 친절에 감동받은 듯, 한리아는 갸륵한 눈망울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곧이어 이한이 내뱉은 말은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한 팀장님은 이쯤 하시죠. 이제부터 이야기는 제가 합니다.”
“어…? 그, 그럴까?”
한리아는 제가 뿜은 연기에 사레가 들린 듯, 눈치를 보며 잔기침을 뱉었다.
{낭자, 이 남사당패 예인이라는 자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소. 어떻게 사람의 다리가 이렇게 길 수가 있다는 말이오. 얼굴은 왜 이렇게 기분 나쁘게 작은 것이며, 또 계집처럼 분칠을 하고는… 하필 내일 백중인데 이런 수상한 자들이 오다니……}
향교가 그려진 족자의 구석진 곳에서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선비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은현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곤 이한의 늑대와 잠시 눈싸움을 벌이더니,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36계 줄행랑을 쳐버렸다.
평소 글밥이나 먹고 조용히 사는 양반이기에, 은현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지금 우리 회사는 공공의 적이 되어있습니다. 십 년 넘게 업계를 양분하던 기득권 두 회사가, 우리가 상장한 이후 자금 조달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죠. 그들은 진입장벽이 낮던 시절, 자본과 로비로 성장해왔고 우린 맨바닥에서 시작해 경쟁에서 살아남으며 실력과 독기로 자리를 잡았어요. 우리의 자산은 감도가 높고 잘 조직된 실무팀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매력의 아티스트들입니다.“
이한의 설명을 듣던 은현은 내심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말을 잘 하지. 학교에서 보던 시절엔 하도 말주변이 없어서, 한국말을 제대로 다 못배웠나 싶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거의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수준이었다.
{이 늑대 애비는 낮으로는 노래하고 춤추다가 밤 되면 책도 읽고 공부를 허네. 보기보다 가방끈이 제법 길어야?}
또 다른 족자 속에서 사철 푸른 해송앞에 싸리빗자루를 들고선 낙엽을 한데로 쓸어 모으는 척 하며 모든 상황을 귀동냥, 눈동냥하고 있던 머슴이 알은체를 했다.
“발굴에서부터 데뷔까지 족히 5년 이상 투자를 한 인재들이 솎아져나가고 있습니다. 에이스급의 몇몇은 어딘가로 잠적했는데, 가끔 연락을 취해오긴 하지만 그 뿐입니다. 경찰에 신고도 해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추적해봤지만 단서조차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며칠 전, 이런 영상 통화가 걸려왔습니다.”
이한은 눈에 띄게 침통해진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켜서 동영상 파일을 재생시켰다.
“사… 살려주세요. 죽고 싶지 않아요.
저 이제 겨우 열 다섯살이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