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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Mar 24. 2022

걷는 사람, 하정우

그러므로, 당신도 걸어야 한다



2011년 백상 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시상자로 나선 하정우는, 전년도 수상작인 <국가대표>에 이어 그해엔 <황해>가 후보에 오르는 바람에 시상자인 동시에 후보자가 됩니다. 공동 시상자인 하지원은 그를 향해 '만약 올해도 수상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2년 연속 수상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하정우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트로피를 들고 국토대장정에 오르겠다고 농담을 하죠. 그리고 하정우는 최우수 연기상 트로피를 들고 서울에서 해남까지 577킬로미터를 걷게 됩니다.





 하정우


하정우는 흥미로운 특징을 가진 배우입니다. 다양한 작품을 찍고 경계가 없는 역할을 맡지만 언제나 캐릭터보다는 배우의 아우라가 더 깊게 남습니다.

그는 국가대표 신분으로 스키점프를 하기도 하고, 황해를 넘어온 밀입국자가 되어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어떤 날엔 부산의 건달이 되기도, 베를린의 스파이가 되기도 하지요.

역할에 녹아들기보단 역할을 끌어오는 타입입니다. 때문에 지옥을 관리하는 사자의 얼굴에서도 따뜻함이 엿보이고 동네방네 오지랖 벌이느라 여자 친구에게 돈을 빌리는 백수로 나와도 마냥 밉지만은 않죠. 어떤 배역에서도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걷는 사람, 하정우>는 배우 하정우가 살아오면서 느낀 생각이나 감정, 경험들을 담백하고 유쾌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삶과 영화를 대하는 진지함에 공감하다가도 일상을 노릇하게 요리하는 듯한 엉뚱함을 보면 웃어버리게 되죠. 무겁게 닥친 시련을 산책하다 묻은 흙처럼 툭툭 털어내는가 하면, 혼잣말 한마디에도 힘이 깃들어 있다며 조심스러워하기도 합니다. 마음 중심에 단단한 닻이라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죠. 하정우는 그 닻을 '걷기'라고 부릅니다.


하루에 3만 보를 걷고 있다는 그는 술 마시러 먼 곳에 갈 때도 걸어서 가고 마신 후에도 걸어서 집에 돌아옵니다. 쉬러 간 곳에선 잘 쉬기 위해 걷고 몸살이 나면 기운을 차리기 위해 걷습니다. 기분전환이 필요하면 운동화부터 찾고 비가 오면 러닝머신 위에서라도 걸어야 합니다. 걷는 것이 너무 좋아 걷기 동아리를 만들어 누가 더 많이 걷는지 경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좋다는 것이, 안 좋으면 안 좋다는 것이 걸을 이유가 됩니다. 걸으면 맥주 맛도 좋아지고 불면증도 남의 일입니다.

이 열성적인 걷기 예찬론자가 탄생한 계기는 무엇일까요.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배우이자 300mm나 되는 발 크기에 걸맞게 연예계서도 '마당발'을 자랑하는 하정우는 할 수 있는 게 '걷기'밖에 없던 무명시절을 이야기합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오를 무대 한 뼘도 없던 그는 좌절하는 대신 무작정 걸어보기로 합니다. 걷기는 멀어 보이기만 하는 세상과 그를 좁혀주는 유일한 통로처럼 느껴졌죠. 미래가 보이지 않아 불안하다가도 걷기만 하면 막막함도 해소되고 세상도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기억은 잠까지 줄여야 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여전히 그를 걷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죠.

그에게 걷기란 무명시절을 견디게 해 준 친구였고 성공에 취해 헛발을 디디지 않게 돌봐준 스승이었습니다. 고독한 직업을 이해해 준 연인이기도 했고 불면증과 불안을 해결한 주치의이기도 했죠.


삶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걷기는 그에게 벌어지는 일들 역시 걷기와 연관시켜 놓았습니다. 첫 문단에 소개된 수상소감과 국토대장정이 대표적이죠.

무너진 터널에 갇혀 3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빛을 보지도 못한 인물을 연기할 때도 그에겐 걷기가 필요했습니다. 촬영 스케줄 상 5일 안에 영화 속 인물로 변신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하정우는 걸어서 김포공항까지 간 다음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무작정 올레길부터 걸었고 다음날 새벽 4시엔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4박 5일 동안 한라산과 올레길을 오가며 걷기를 반복하자 체중은 4킬로그램 줄어 있었고, 무엇보다 '산바람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연 많은 방랑객처럼 걸어 다닌 덕분에' 꽤 수척한 몰골도 완성되었습니다.

야심 차게 기획한 영화 <허삼관>이 흥행에 참패했을 때 그는 삶과 걷기의 유사성을 생각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대를 모았던 영화 <군도>가 생각만큼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때도, 맡았던 영화 배역에 심취해 심신이 불안정할 때도 그를 구원한 것은 걷기였습니다.





걷는 사람, 하정우


걷기에 관련된 이야기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하와이에서 10만 보 걷기에 도전했던 일화죠. 걷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하와이에 푹 빠져있던 하정우는, 걷기 모임 멤버들과 하루 10만 보 걷기에 도전하기로 합니다. 초반엔 순조로웠던 10만 보 걷기는 5만 보가 지나면서 위기를 맞이합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입이 바짝바짝 마릅니다. 대화도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다리는 돌덩이처럼 무겁고 발바닥이 화끈거려서 땅을 디디기가 힘듭니다. 숨이 가쁘고 열이 올라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죠. '난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포기하고 싶지만 그 문장을 말로 내보낼 힘조차 없습니다. 무아지경이 되어 걷는 수밖에 없습니다. 7만 보를 지나자 사라졌던 낙관이 아주 잠시 찾아옵니다. 어쩐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고 곧 길 끝에 도달하리라는 희망도 생깁니다. 하지만 희망의 순풍은 길게 가지 못합니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5만 보때 그만두지 못한 자신이 한스럽습니다. 고통의 끝에 깨달음이 있으리라는 기대도 사라지고 '왜 이걸 하고 있어야 하느냐'는 회의감 만이 남습니다. 걷기로 한 이유가 없으니 회의감을 만족시킬 대답이 있을리가요. 고통의 한복판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걷기의 의미'가 아니라 '포기해도 되는 이유'를 찾고 있던 스스로였습니다.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고 이 길은 원래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다는 생각이 들죠. 스스로 세운 목표를 '포기할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으로 바뀌 치기 합니다.

하정우는, 이것이 꼭 걷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 79p



10만 보 걷기는 삶과 닮아 있습니다. 위기가 반복해 찾아오고 판단력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욕망은 점점 더 짧은 주기로 찾아오고 회의감은 짙어져만 갑니다. 책은 그럴 때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운동화를 고쳐 매고 발 상태를 점검해 다음 지점을 준비하는 시간 말이죠. 지쳤다고 그냥 늘어져 있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은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라고 말하죠.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 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도 쉬지 않고 계속 걷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10만 보 걷기의 휴식이 발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라면 삶에서의 휴식은 지나간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을 대비해두는 것이겠죠. 한계를 파악하고 쉬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만이 무사히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목표가 가까워오자 걷기 멤버들도 조금씩 기운을 차립니다. 가슴 벅찬 성취감이 그들을 기다립니다. 고통스러웠던 '10만 보 걷기'의 의미는 목표 그 자체에 있던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후회하고 자책했던 순간들을 견뎌낸 보잘것없는 한걸음 한걸음에 있었던 것이죠.

마침내 그들은 숱한 고뇌와 체력의 한계를 딛고 10만 보를 찍습니다. 10만 보 걷기의 고통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날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걷기 멤버들에게 남긴 의미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네요.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82p






책에는 걷는 이야기만 소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배우나 영화계 쪽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걷던 길, 대하는 사람들, 드나들던 가게, 머물던 아지트까지 달라지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하고, 배우만 겪을 수 있는 특별한 일화들도 소개합니다. 존경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취미, 여행, 친구들과 있었던 일들도 등장하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생수병 하나씩 나눠 들고 산책하는 기분이 듭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에 걸어야 할 이유를 갖다 붙이는 유쾌한 사람과 말이죠. 걷고 싶어지네요. 밖으로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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