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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Mar 31. 2022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선바이저 속에 숨겨둔 나의 지중해여



박민규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9년 황순원 문학상>이라는 단편집에 실린 <근처>라는 작품을 통해서입니다.

묘한 인상을 받았죠. 그동안 읽어 온 소설 같기도 했고 처음 읽어 보는 소설 같기도 했습니다. 그 둘 사이 어디쯤 위치한 글이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 같았어요. 친숙한 동시에 생소했죠. 돌이켜 생각해보면 박민규의 작품은 전반에 걸쳐 양가적 감상을 지니게 합니다. 익숙한 동시에 낯설고, 유쾌한 동시에 싸늘하고, 달콤한 동시에 먹먹하고, 탐미적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어지죠.


본격적인 작품 이야기에 앞서 짚을 부분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에는 표절 소설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습니다.

초반의 여러 부분이 인터넷 블로거 한재영 씨의 <거꾸로 읽는 한국 야구사>를 베끼다시피 옮겨왔고, 작가는 '연락할 길이 없는 한재영 님께 감사'하다는 언급을 작가의 말에 남기고도 자료를 참고 삼았을 뿐 표절은 아니라고 부인했죠. 분노한 네티즌들은 두 글을 비교한 자료를 여러 곳에 게시했고, 자료들은 지금도 작품과 함께 연관검색이 되고 있습니다.  

오래된 일인데도 구체적으로 기억에 남은 것을 보니 사건은 작가 본인에게도, 작가의 팬인 저에게도, 작가의 작품인 소설에게도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겼네요.

비교적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엔 인터넷을 떠도는 유머글로 생각해 저작권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표절 행위가 분명했으며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한 기사가 있습니다 (2015, 09, 06 한국일보). 뒤늦게라도 잘못을 인정했다니 반가운 일이네요.


작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삼미 슈퍼스타즈


경주에서 토함산을 오르던 버스가 굴러 11명이 사망하고, 경남에서 순경이 카빈을 난사해 56명이 사살되고, 서울에서 이철희 - 장영자 부부가 어음사기를 치고, 부산에서 미문화원이 불에 타고,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고,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이 자행되고, 소련에서 브레주네프가 사망하고, 미국에서 우주왕복선이 발사되고, 라스베가스에서 김득구가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사망한 1982년.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탄생한 프로야구는 여기저기서 끓어오르던 여론을 단숨에 빨아들입니다.

사람들은 대화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로야구를 화두로 선택했고, 어제까진 존재하지도 않았던 리그에 대해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프로'라는 문구는 사람들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으며, '평범하다'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낭비일 정도로 평범한 인천의 한 소년 역시 시대가 몰고 온 벅차오름을 피할 수는 없었죠. 국민교육헌장과 알파벳을 외우는 것 말고는 성취할 게 없던 12살 소년은 '프로'에 열광했으며 프로야구에 열광했고 프로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에 열광했습니다. 프로야구는 부정할 방법이 없는 위대한 스포츠였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팀이었죠. 모두의 기대 속에 리그가 시작되기 전까진 말입니다.

 


프로야구 원년, 우리의 슈퍼스타즈는 마치 지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패배의 화신과도 같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 오늘도 지고, 내일도 지고, 2연전을 했으니 하루를 푹 쉬고, 그 다음 날도 지는 것이다. 또 다르게는 일관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용의주도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주도면밀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쉽게 말하자면 거의 진다고 할 수 있겠다. 60p



프로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는 팀 로고에 그려진 슈퍼맨도 아니었고, 팀 이름처럼 슈퍼스타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프로조차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내키는 대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상적인 팀 운영을 했고 창의력을 경쟁하듯 다양한 형태로 패배했습니다.

원년 리그에 걸맞게 다른 팀이 최초의 홈런, 최초의 도루, 최초의 승리와 연승의 트로피에 이름을 새길 때 그들은 향후 100년은 깨지지 않을 연패 기록의 금자탑 세우기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죠. 야구장을 찾은 소년은 1루수가 선발투수로 등판해 상대 팀 4번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모습과, 같은 투수가 단 10초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강판당하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8점 차 경기가 뒤집혀 '야구는 9회 말 2 아웃부터'라는 말을 탄생시킨 전설적인 역전패를 목격해야 했고, 마지막 투수가 끝없이 안타를 얻어맞는 바람에 경기가 종료되지 않는 것을 보며 혹시 자기가 축구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야 했습니다. 저러고도 프로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리그가 개막되고 한 달이 지나자 중학생이 된 소년의 머리엔 흰머리가 몇 가닥 솟아났고, 그의 절친 조성훈은 멍하니 있다 분필을 맞는 일이 잦아졌고, 다른 친구는 국민학교 때도 흘리지 않았던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삼미 슈퍼스타즈가 전기 리그 30패에 도달했을 때, 소년은 중학교 1학년의 가슴에도 한이 맺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개막 이듬해인 1983년, 숱한 화제를 뿌리며 기적처럼 2위의 성적을 거둔 삼미 슈퍼스타즈는 84년이 되자 당연하다는 듯 최하위로 돌아가 1985년엔 해체를 맞이하게 됩니다. 고등학생이 된 주인공과 친구 조성훈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삼미의 패배 소식에 무감각해져 있을 때죠. 골목에 숨어 담배를 피우던 조성훈은 주인공을 향해 야구장에 가지 않겠냐고 묻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고별전이니까...."115p



예상과는 달리 한산하고, 예상했던 만큼 붐비는 인천야구장에서 그들은 삼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패배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고 삼미는 통산 120승 4무 211패라는 이름의 화석이 되죠. 주인공은 오싹한 기분을 느낍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은 과연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고, 거의 이대로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아버지가 될 확률이 높은 인생이었다. 타율로 치면 2할 2푼 7리 정도이고, 뚜렷한 안타를 친 적도, 그렇다고 모두의 기억에 남을 만한 홈런을 친 적도 없다. 발이 빠른 것도 아니다. 도루를 하거나 심판을 폭행해 퇴장을 당할 만큼의 배짱도 없다. 이대로 간다면...... 맙소사, 이건 흡사 삼미 슈퍼스타즈가 아닌가. 124p



주어진 삶을 평범하게 살다 보면 프로의 세계에 도착하는 순간 조롱거리로 전락할 것입니다.

주인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류대학에 가겠노라 다짐합니다. 프로야구리그와 함께 세상에 출연했던 문구들인 엘리트, 프로, 중산층을 차례차례 섭렵하기로요. 목적지라 여겼던 '프로'는 '중산층'으로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 수단을 쟁취하려면 우선 '엘리트'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삼미슈퍼스타즈처럼 화석이 될 수는 없었죠.


아무리 봐도 3위와 4위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처럼 보이고 6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하위의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결국 문제는 '평범'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평범인가? 거기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1980년대의 세상은 3위 MBC 청룡과 4위 해태 타이거즈를 하나로 꽉 묶어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다.
중산층.
바로 중산층이다. 이 파워풀한 단어는, 그 후 세상을 바꿔나가는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이 하나의 단어로 인해, 이제 확실히 도표의 3, 4위가 새로운 평범의 기준이 된 것이다. 무진장 노력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
"남들 사는 만큼 사는 거죠."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
라고 말하는 이상한 세상이 온 것이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127p



엘리트가 되겠다는 다짐은 잘 지켜집니다. 일류대학에 진학한 주인공은 졸업만 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학과를 선택해 '리프트를 내라면 내고, 출석을 부르면 대답하고, 시험을 치라면 치면서' 살게 되었죠.

중학교 땐 '엘리트'교복을 몸에 맞게 시켰고, 이젠 사회의 교복인 '엘리트'에 알맞게 스스로를 시켰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인재였고 프로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인간이었죠. 가이드라인은 선명했고 그는 라인을 따라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흡사 삼미 슈퍼스타즈  


작품은 주인공이 20대를 보낸 1988년과 30대를 보낸 1998년을 관통합니다. 주인공은 대학생 시절을 '그녀'와 보낸 뒤 헤어졌고, 이후 직장을 얻고 결혼도 하며 그 외 수많은 변화들을 거쳐 마침내 중산층이 되었죠.

그리고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추락으로 대표되는 '낙오'를 목격한 사회는, 타인의 절망이 다른 이의 심리적 탈출구로 훌륭히 소비될 수 있음을 감지하죠. 프로가 되고도 버텨내지 못했으니 나약한 팀의 잘못이다. 재개발을 막지 못했으니 가난한 집의 잘못이다. 일류대에 가지 못했으니 공부를 게을리 한 학생의 잘못이다. 직장에서 쫓겨났으니 업무를 태만히 한 직원의 잘못이다. 가정을 지켜내지 못했으니 뭐가 뭔진 몰라도 하여간 니 잘못이다.

프로를 거쳐 중산층이 되기만 하면 이후를 보장해주리라 믿었던 세상은 시치미를 뗍니다. 일류대 졸업장은 IMF 경제위기 이후에 입사한 주인공에게 아무런 방패도 되어주지 못하죠. 경제 호황기 시절 어렵지 않게 입사한 선배들에게 일류대 출신 신입사원은 성가신 견제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입성한 프로의 세계는 무자비한 룰을 제시한 뒤 따르지 못하면 낙오자의 낙인을 찍어 짓밟는 곳이었습니다. 룰에 따르기 위해 다른 건 뒷전으로 미뤘지만 달라지는 건 없죠. 프로의 세계는 그때마다 새롭게 변형된 룰을 제시할 뿐입니다.

주어진 일과 주어지지 않은 일을 도맡아 수행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집니다. 구조조정의 불길한 그림자와 그를 비웃는 동료들의 웃음소리가 따라다니죠.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아내는 이혼을 요구합니다. 이 결혼생활은 의미가 없어. 지쳐버린 투수는 마운드에 서서 덕아웃을 바라봅니다. 던지는 족족 방망이에 얻어맞아 홈런과 안타의 개수가 끝없이 늘어갑니다. 열심히 해왔지만 중계진과 관중은 그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남자는 있는 힘껏 공을 던지지만 방망이에 맞은 공은 외야를 넘어가버립니다. 이 결혼생활은 의미가 없어. 덕아웃에서 사인이 날아옵니다. 프로답게 책임지고 프로답게 마무리해라. 감독은 무표정합니다. 내가 끝내야 하는구나. 그런데 어떻게? 주인공은 오싹한 기분을 느낍니다. 맙소사. 이건 흡사 삼미 슈퍼스타즈가 아닌가.


현실이란 지면에서 5센티쯤 떠다니는 듯한 설정도 있고 한쪽 눈을 감아줘야만 납득 되는 전개도 있지만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고려한다면, 이 작품은 그 헐거움 마저도 소설의 장치가 되는 특별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하진 못했지만 두 번째 챕터인 '그녀'와 이야기 역시 아주 매력적이죠. 그 챕터만 따로 다루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죠.


개인적으로는 표절 문제로 작품이 훼손되어 버린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표절시비에 휘말렸던 초반부의 유머가 아니라 중반부의 애틋한 메시지와 후반부의 먹먹한 위로에 있때문입니다.

특히 야구와 어긋나거나 관련 없던 사람들이 야구를 중심으로 얽히는 후반부는 전사로 쌓이던 이야기 어우러져 큰 울림을 줍니다.

저는 박민규 작가가 가끔씩 발표하는 짧고 묵직한 단편들을 훨씬 좋아합니다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작품의 이 후반부야말로 박민규 문학의 정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이후로 발표된 수십 편의 장, 단편을 모두 포함하고서라도 말이지요.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은 일을 시작한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뛰어다니는 것은 개들뿐이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잔다. 쿨쿨 잔다. 여러분이 잠든 이 시간에도 이웃 면에서는 다수확 신품종의 벼 모종 보급을 비밀리에 착수, 내년의 수확 경쟁에서 한발 앞서가면 어쩌지요? 라고 물어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그렇다면 경쟁에서 앞선 이웃 면이 그 돈으로 국내 최대, 국내 최고의 농지형 테마파크를 국내 최초로 건립해버리면 어쩌지요? 라고 해봐야 그러거나 말거나다. 이곳은 무엇이 들어와도 국내 최후이며, 삶의 분주함으로 따지자면 국내 최저이며, 그 어귀에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 동네 사우나탕 정도의 규모를 지닌 국내 최소의 해수욕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함없이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할 만큼의 일을 하고, 먹을 만큼의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것이다. 글로 정리하고 보니 마치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 같다. 276p






드물게도 톰 크루즈가 악역으로 등장했던 영화 콜래트럴이 떠오릅니다.

택시기사로 분한 제이미 폭스는 중압감에 시달릴 때 자동차 선바이저 속에 숨겨둔 지중해 사진을 보며 잠시 휴가를 다녀오죠.

필요한 것 외엔 소유하지 않고, 돈이 아니라 시간이 많은 것이 직업 기준인 사람들이 모여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야구'를 하는 이 작품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프로의 세계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바이저 속 지중해 사진이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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