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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Apr 08. 2022

야시

잊혀진 길을 걷는 늙지도 변하지도 않을 벗에게



기억하고 싶은 사연을 담고 있어 여러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책장 한 자리를 마련해주던 책입니다. 책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된다면 이 책도 꼭 다뤄달라던 사연 속 사람과의 얘기가 생각나 10년 만에 다시 읽게 되었네요.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일본 문화, 특히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니다. 서울에 있던 커다란 헌책방에서 이 작품을 제게 건네던 얼굴이 억나군요. 분한 듯 뿌듯한 듯 묘한 표정이었죠.


"이런 일이 잘 없어서 인정하긴 싫은데, 이 책 표지는 일본 원작보다 한국판이 훨씬 더 예뻐."



정말 예쁘죠?



책은 <바람의 도시>와 <야시>, 두 개의 중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땐 책 제목과 동일한 <야시>가 좋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오늘 다룰 작품 <바람의 도시>가 훨씬 더 좋더라구요. 오래전에 읽은 작품을 다시 읽는다는 건 변하는 취향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즐거운 경험니다. 그때 읽었던 책을 다시 만나고, 그 책을 읽던 나도 다시 만나구요.






 잊혀진 자들이 걷는 길


우연히 알게 된 이승과 저승의 경계 '고도'를 여행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기록된 적도 없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거의 남지 않은 길이죠. 특별한 재능을 지닌 극소수의 사람과 귀신들만 다닐 수 있는 길입니다. 주인공은 7살에 우연히 알게 된 고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친구와 함께 다시 들어서게 된 12살짜리 남자아이입니다.  


'고도'는 기본적으로 길과 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공간입니다. 고도를 걷는 사람은 유리창처럼 밖의 상황을 볼 수는 있지만 정해진 '구멍'이 아니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습니다. 또한 밖의 물건을 고도로 가져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고도에 속해 있는 것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칙도 존재합니다. 주인공과 친구 가즈키는  없는 집들이 늘어선 골목을 걸으며 대낮에도 귀신이 돌아다니는 고도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씁니다.


 

조금 걷다가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길 저쪽의 신기루 같은 흔들거림 속에서 뭔가 빨간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빨간 것은 위아래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다가온다.
가즈키와 나는 길가로 비켜섰다.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길 저쪽에서 다가오는 것들의 모습이 점차 분명해진다.
빨간 우산을 쓴 기모노 차림의 여성들이다. 모두 일고여덟 명쯤 된다. 고풍스러운 종이우산을 쓰고 쪽빛이나 진홍색 바탕에 금사를 짜넣은 고급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땋아내렸고 낯에는 하얀 분칠을 했다.
맨 앞의 여자가 우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가자 뒤따르는 여자들도 눈인사를 했다. 그들은 바람 속을 춤추듯 너울거리면서 꼬리를 끄는 비명 같은 음향을 남기며 우리 앞을 지나갔다. 시간상으로는 몇 초 동안의 일이어서, 흡사 플랫폼에서 특급열차가 통과하는 것을 바라보는 듯했다.
우리는 그들이 모래먼지와 함께 사라져간 저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요괴였어, 지금 그 사람들. 대낮에도 나오잖아." 38p



고도에 대한 호기심이 집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조금씩 바뀌어갈 때 둘은 '렌'을 만나게 됩니다. 고도에서 지도를 제작하는 청년이죠.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비교적 짧은 분량임에도 소개되는 인물과 설정은 넉한 흥밋거리를 제공합니다.

원한에 사무쳐 고도를 떠도는 사람, 고도와 밖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사람, 밖에서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을 위해 고도에 방문한 사람, 걸어 다니는 시체와 요괴, 생명을 부활시켜준다는 절. 주인공과 가즈키의 이야기는 주인공과 렌의 이야기가 되었다가, 다시 렌의 과거와 렌이 고도를 떠돌기 전의 이야기로 시간대를 넘나들며 펼쳐집니다.






동화, 어른들을 위한


동트는 시골 새벽의 서정적 풍경으로 인도하는가 싶더니 곧 목이 잘린 시체가 구더기 떼를 얹고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름답게 펼쳐진 시골길엔 넝마를 걸친 해골 무리가 능청스럽게 갈길을 가고 있고, 험상궂은 요괴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던 주인공과 친구는 쿡쿡 웃으며 농담을 합니다.

 

저녁때가 되자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렌은 짐칸을 시트로 덮고 짐칸 위에 천막을 쳤다. 물소는 비를 맞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길은 질척이고, 물웅덩이에 빠진 내 발은 완전히 젖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꾸륵꾸륵 물소리가 났다. 62p



목가적으로 묘사되는 풍경 속 물소의 수레에는 시체가 실려있죠.

이질적인 풍경이 만나 고유의 색채로 서로를 물들이는 모습은 궂은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세계관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방식 태연합니다. 길을 잃었는데 누군가 알려준 곳으로 갔더니 귀신들이 다니는 길이었다던가, 친구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더니 요괴들이 물건을 파는 야시장이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구구절절 배경을 설명하면 경계선을 걷는 듯한 판타지 특유의 매력이 사라져 버리죠. 배경에 대한 논리적 설명보다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는 게 더 좋습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후미진 건물 구석에 다른 세계와 연결된 통로가 있다던가, 야시장에 도착했더니 너구리가 기모노를 입고 걸어 다니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노련한 농부가 수레를 이끌듯 차근차근 스토리를 아우르면서도 때때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흘리지 않고 짚어줍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독자는 흔들리는 수레에 걸터앉아 농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죠. 때때로 을씨년스러운 길로 들어서기도 하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곧 아름다운 풍경이 다시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작품에 등장하는 물소처럼 기분 좋게 비를 는 것 같은 작품입니다.

때로는 12살 아이가 되어 주인공 일행과 함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때로는 렌의 곁에서 을 동행할 수도 있죠.






귀로로 완성되는 성장


인상 깊게 보았던 몇몇 일본 작품의 공통된 주제는 '평범한 일상으로의 안전한 복귀'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주제가 스토리의 전부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역시 불안정한 일탈에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안전한 제도권으로의 복귀가 주제니까요. 대상에 따라 헤피엔딩이기도 아니기도 한 이 영화는 작은 집단인 '어느 가족'이 해체됨으로써 큰 집단인 사회가 평범한 일상을 회복했습니다.

<야시> 역시 이야기는 평범한 곳으로의 복귀로 끝맺어집니다.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지만 고도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친구인 가즈키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왔으니 가족들도 그 외의 일은 문제 삼지 않죠.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고도는 점점 기억에서 옅어질 것입니다. 같이 돌아오지 못한 가즈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에겐 그의 운명이 있는 것이겠죠. 적어도 주인공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기억나지 않는 며칠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상으로 무사히 복귀했고 이야기는 끝난 것이죠. 이런 식의 주제와 결말 때문에 일본의 문학을 시시하다고 평하는 이도 있습니다.






두 번째 주인공에 해당하는 렌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태생적 배경 탓에 고도의 소유물이 되어버린 렌은 규칙에 따라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가 정서적 아버지로 따랐던 호시카와도 그의 곁을 떠나버리죠.

 


겨울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호시카와는 마차를 몰고 있었고 나는 호시카와 옆에 있었다.
얼음 알갱이가 섞인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왔다.
"자, 내가 아직 근력이 있을 때 헤어지도록 하자. 다음 네거리에서 각자 제 길로 가자꾸나. 나는 북쪽으로 가마. 너는 서쪽으로 가거라.
서쪽으로 잠시 걸으면 여관이 나올 거다. 그곳 여주인한테 내가 단단히 일러놓았다. 꼭 들러라.
여주인이 네게 열쇠를 내줄 것이다. 내가 주는 선물이다.
너는 좋은 아이였어. 단풍나무 네거리를 기억하지? 우리가 만난 곳 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거기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우리는 부자지간은 아니야. 하지만 남도 아니지. 짝패였어. 그렇지? 괜찮다. 울지 마라.
짝패로써 예언을 해주지. 네 인생이 나빠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축복받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아. 바깥 세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말이야.
머나먼 미래에 네 몸은 거목이 되고 네 영혼은 고도를 벗어나 세계를 넘나드는 바람이 될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꾸나." 89p



사고처럼 렌의 삶에 뛰어든 주인공과의 이별은 담담해서 더욱 쓸쓸합니다.

 


이튿날 오후, 렌과 나는 두 갈래로 갈리는 보리밭 두렁길에 서 있었다. 길쭉하게 자란 파란 보릿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 길을 곧장 걸어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어. 그럼 잘 가. 네 친구를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렌 형,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여행이 끝나고 귀로가 시작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은 그날 아침부터 그랬다. 가슴속에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 기분은 뭘까.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고도의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도 모른다. 고도의 바람을 너무 많이 쐬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귀로가 없는 청년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렌은 팔짱을 끼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돌아가지 말지 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너무 쉽게 대답하는군.
"가고 싶은 곳까지 내가 데려다줄게. 거기서 헤어지는 거야. 오 년쯤 지나면 떠돌이 생활도 익숙해질 거야. 바다를 건너는 길도 있다고 하더군. 갈 곳은 무궁무진해. 힘든 일이야 많겠지만 재미난 일도 많을 거야. 어때?"
내 가슴속에 불던 바람이 한층 강해진다. 왠지 아주 즐거워지는 듯하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광대한 세계가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득 가슴속의 웅성거림이 사라졌다.
렌은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쉬워하지 마라. 기회가 있으면 어디서든 다시 만나자."
그는 발길을 돌렸다.
청년이 물소수레를 끌고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122p



고도에 들어선 그 누구도 제까지나 렌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렌은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도 결국엔 놓아야 하는, 추억과도 같은 존재죠. 렌과의 이별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이별이 주인공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을 뒤로하고 삶은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여행이 합쳐진 거대한 여정이죠. 여정 속 이곳저곳에 존재하는 무수한 고도에 우리는 렌을 두고 왔습니다. 마음 깊이 그를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머물거나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와 함께 여행하고 고난을 겪은 것은 함께 고도에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니까요. 삶을 찾아오는 고통은 결국 우리를 안전하고 평범한 삶으로 이끕니다.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가 주제기 때문에 일본 문학은 시시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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