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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Jan 18. 2023

남한산성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늙어서 비틀거리던 나라 명明이 멸망으로 향하던 1636년 겨울. 조선에 문서가 도착합니다.

명을 사대하고, 명을 아비라 칭하고, 명에게 제사를 지내는 조선 조정을 향한 국서입니다. 청을 배척하고, 청을 도적이라 칭하고, 청에게 침을 뱉는 조선 임금을 향한 국서입니다. 대륙을 장악한 이자, 형들을 죽이고 에 오른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입니다.



내가 이미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땅 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이 나를 황제로 여김은 천도에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또 내가 칙으로 명하고 조로 가르치고 스스로 짐을 청함은 내게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명을 황제라 칭하면서 너의 신하와 백성들이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까닭을 말하라. 또 너희가 나를 도적이며 오랑캐라고 부른다는데, 네가 한 고을의 임금으로서 비단옷을 걸치고 기와지붕 밑에 앉아서 도적을 잡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한다.
하늘의 뜻이 땅 위의 대세를 이루어 황제는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네가 그 어두운 산골짜기 나라에 들어앉아서 천도를 경영하며 황제를 점지하느냐. 황제가 너에게서 비롯하며, 천하가 너에게서 말미암는 것이냐. 너는 대답하라. 32p



두려움에 사로잡힌 왕을 둘러싸고 말이 싸움을 벌입니다. 기름진 뱀과 같은 말이, 흐린 날 산맥과 같은 말이 벌이는 싸움입니다. 말은 서로에게서 도망치는 꼬리를 노리며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임금이 봐야 할 곳을 가로막습니다. 말言들이 일으킨 산맥 너머로 청병이 모는 말馬들이 눈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지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성 안에 있는 서로를 죽이라 말로써 간청합니다. 말로 쌓인 산맥 너머를 눈먼 사람처럼 더듬던 임금은 탄식합니다.



... 경들은 저 너머 겨울 들판이 보이는가? 나는 보이지 않는구나. 15p



이조판서 최명길이 앞으로 나섭니다. 책을 읽듯 무덤덤했고 아무런 조바심도 스며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지만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이 최명길을 통해 나와 조선 역사에 기록됩니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말이 뿜어낸 흐리고 어두운 안개를 걷어낼, 마침내 임금이 듣고자 했던 말입니다.






청병 장수 용골대는 그가 모시는 칸을 닮았습니다. 산은 멀고 별은 가까운 여진女眞 들판에서 단련된 날카로운 눈매는 먼 목표를 가까이 당겨서 들여다보았고, 가까운 상황을 멀리 밀쳐내어 시야 전체에 두었습니다.

조선 임금이 강화도로 향하면 일이 번거로워지리라 판단한 용골대는 전투를 피해 곧장 서울로 달려와 강화도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합니다. 용골대는 10년 전 후금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강화도로 향하던 어가행렬은 한밤중에 말머리를 돌려야 했습니다. 목적지가 남한산성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은 무거운 동요를 일으킵니다. 깃발 들던 기휘들이 말편자를 갈아 박는 틈에 사라집니다. 기휘를 잡으러 쫓아갔던 군사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자가 젖은 버선을 갈아 신는 사이 견마잡이가 달아납니다. 오줌을 누려고 뒤쳐졌던 궁녀들이 행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피난민과 의장이 뒤엉키고, 백성들이 끌고 나온 마소가 어가와 부딪칩니다. 살기 위해 임금을 따르려는 자들과 살기 위해 임금을 버리려는 자들이 뒤엉키고 등을 떠밀고 서로를 밟아 제 살길을 찾습니다. 수라상 간을 맞출 간장독이 깨지고, 눈보라 속에 주저앉은 말들은 채찍을 맞고도 일어서질 않습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임금은 남한산성에 들었습니다. 먼지 쌓인 처소를 당상관들이 걸레로 닦자 차가운 구들 위로 임금이 올라섭니다.



강화행궁을 불 지르지 않는 게 다행이로군...... 37p



지난 십 년 세월을 선명히 요약하는 중얼거림 은 기록합니다. 






임금이 피신한 남한산성에선 두터운 눈을 뚫고 말 불꽃 타오릅니다.


싸움을 피해야 살길이 열린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말과 싸워야만 살길이 열린다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말은 살길을 목적으로 두고도 병존하지 못합니다.

말길을 열어 화친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말과 말길에 매달리면 화친할 수 없다는 김상헌의 말은 화친을 목적으로 두고도 병존하지 못합니다.

추위와 굶주림이 군사를 죽이고 있으니 말길을 열여야 한다는 명길의 말과 죽지 않은 군사들이 있을 때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상헌의 말은 충심을 찾아 향하나 엇갈린 과녁을 목적으로 둔 이유로 병존할 수 없습니다.


명길의 충심은 무거운 치욕을 견디어 임금과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데 있고, 상헌의 충심은 가벼운 죽음을 견디어 조선대의를 치욕으로부터 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아침저녁이 되고 저녁아침이 되는 동안 두 충신이 고하는 말은 삭풍이 에는 구들 위와 얼어붙은 맞배지붕 아래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릅니다.

명분과 실리를 가르는 불꽃이었습니다. 대의와 사세를 가르는 불꽃이었습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불꽃이었습니다.

내행전 마루로 들이치는 눈보라도 어쩌지 못하는 불꽃이 참담해 임금은 돌아앉아 벽을 바라봅니다.

성안에 살던 짐승이 씨가 말라 텅 빈 벽 너머에선 개가 짖는 소리도, 닭이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루가 차니 경들이 춥겠구나. 164p



임금이 처소 안으로 사라지자 늙은 상궁이 미닫이를 닫습니다. 고요에 머물던 사관이 고개를 듭니다. 먹즙을 빨아들인 붓이 하루를 기록합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성벽에 쌓인 눈이 녹아 냉이를 키우던 1637년 봄. 조선 왕 인조는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감당했습니다.

그날, 조선이 내세운 대의는 창검 앞에 사위었지만 깊은 힘을 품은 땅은 잉걸불로 살아남아 허물고 짓밟힌 성첩 위로 봄나물을 밀어 올렸습니다.

민들레가 피고 지고 달이 차고 수많은 날 동안 대의와 실리는 세워졌다 짓밟히기를 반복할 테죠. 승리와 굴욕이 비석에 새겨지고 또 불태워질 순간에도 번성하거나 쇠하며 백성은 역사를 이어갈 겁니.

언 강이 녹아 사람과 말 시체가 물에 잠기 어느 봄. 인간이 오랑캐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그날, 넓게 퍼져나간 굴욕은 고약한 악취로 흩어졌지만 깊이 새겨진 록은 으고 다 유산이 되었습니다.


겨울이 봄이 되고 봄이 겨울이 되는 수많은 해와 달과 날을 조선은 기록했습니다. 의견을 보태 해석하지 않았고 주관을 입혀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삶과 치욕, 죽음과 영광이 조선 글자 위에서 무게를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빠트리지 않는 기록은 명분과 실리가 부리는 변덕 속에서 만고의 역적이라는 당대 평가와 진정한 정치가라는 후대 평가가 한 사람 몸에 깃들 수 있음을 전했습니다.

치우치지 않는 기록은 죽음을 두고도 타협하지 않는 충정이 허망한 혀끝에서만 춤추지 않았음을 전했습니다.

기록하고 남기는 일을 귀하게 여겨 지속한다면 과거 두 충신이 그랬듯 훗날을 사는 누군가도 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여기는 일을 행할 테죠.

비참한 패배도 참담한 치욕도 살아남은 자이 평가할 몫입니다.

외면하고 싶은 역사를 꺼내 밝은 곳에 펼치고, 기억하고 전하도록 으고 다진 작품 <남한산성>은 그래서 찬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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