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의 윤슬 Jan 05. 2023

프리솔로

일천 미터 상공에서 펼쳐지는 춤사위 속으로





프리솔로 등반은 안전도구인 로프나 파트너 또는 어떤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기어오르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이 극명한 단순함 속에 순수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 가능성은 최고이다. 다시 말하면 추락은 곧 죽음이다. 50p




태양이 떠오르기엔 이른 어두운 새벽, 티셔츠 한 장을 입은 남성이 문라이트 버트레스의 암벽을 오르고 있습니다. 몸에 둘러야 할 로프도, 벽에 고정할 볼트나 캠도 보이지 않습니다. 360미터 아래로 아찔하게 펼쳐진 지상에 추락하지 않기 위해 믿을 것은 크랙에 끼워진 손가락 두 개가 전부입니다. 허공엔 세찬 바람이 불고 해가 들지 않는 직벽은 차갑고 위협적입니다. 벽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체중을 지지할만한 스탠스는 없습니다. 손가락 두 개로 매달려 있는 암벽 꼭대기에서 위태로운 몸을 감싸고 있는 건 오직 공기뿐입니다. 남성은 등 뒤로 펼쳐져 있을 붉은 바위와 초록색 숲을 생각합니다. 멀리서 굽이쳐 흐를 버진강의 도도한 물결을 상상합니다. 단 하나의 사소한 실수가 죽음으로 직결되는 고요의 감옥엔 어떤 인공물의 소음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알렉스 호놀드는 귀에 꼽혀 있던 에어팟을 뺍니다.


마음속에 차오르는 진정한 평화로부터 그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포를 다루는 태도  


손가락에 묻힌 초크와 암벽화 외엔 어떤 장비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직벽에 대항하는 프리솔로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등반이라는 점에선 경탄의 대상이지만 사소한 실수로도 목숨을 잃는 위험천만한 행위라는 점에선 지탄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프리솔로 등반가인 알렉스 호놀드Alex Honnold는 22살이던 2008년, 360미터 높이의 수직암벽인 문라이트 버트레스Moonlight Buttress를 1시간 23분 만에 완등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니다. 1971년 산악계의 전설인 제프 로우와 마이크 바이스가 인공물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 반나절 만에 초등했던 곳이죠.

여기에 멈추지 않고 프리솔로로는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평가되던 600미터 높이의 하프돔Harf Dome을 2시간 50분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완등한 알렉스는, 오래전부터 꿈꾸던 고도 2,300미터 직벽 높이 920미터의 엘 캐피탄EL Capitan을 프리솔로 등반으로 오르기로 결심합니다. 1958년 워런 하딩과 동료들이 47일 동안 공략해 초등한 이후 수많은 클라이머들에게 희망과 좌절을 안긴 곳이죠. 알렉스가 엘캡(엘 캐피탄의 줄임말)에 오른다면 프리솔로 방식으로 정상에 오른 최초의 등반가가 됩니다.





알렉스의 도전과 업적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의 프리솔로 등반 방식에는 가장 용감한 클라이머들조차 의구심을 품습니다. 어린 시절 알렉스의 영웅이자 이제는 등반 파트너가 된 토미 콜드웰Tommy Caldwell마저 프리솔로 등반을 지속하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니까요. 프리솔로 등반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날씨, 컨디션, 부서질 위험이 있는 돌조각, 이끼, 암벽에서 마주칠 인공물과 다른 클라이머 등의 변수를 감수해야 합니다. 위로 당겨줄 로프가 없기 때문에 등반을 포기하거나 루트상의 이유로 클라이밍 다운을 하게 되면 위험이 더 커지죠. 다른 이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 설치한 볼트나 캠등의 인공물을 고의로 피해야 하기 때문에 루트도 까다로워집니다. 추락은 곧 죽음이라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압박을 견디며 수시간에서 수십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이며 감당해야 할 것들이죠.

그러나 알렉스는 이 모든 상황이 부여하는 공포야말로 프리솔로 등반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가능하게 만드는 법  


프리솔로 등반은 무모하고 위험천만해 보입니다. 실제 프리솔로 등반가의 사망률은 끔찍한 수준입니다. 전성기를 지날 때까지 생존한 프리솔로 등반가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니까요.

영화나 책을 보기 전까진 저 역시 알렉스 호놀드를 스릴과 유명세에 취해 터무니없는 행위를 하는 등반가로 여겼습니다. 목표로 정한 암벽을 등반하기 위해 거치는 준비과정을 몰랐을 땐 말입니다.


스릴과 공포만 존재할 것 같은 프리솔로 등반의 대부분은 집요한 준비로 채워집니다. 알렉스는 로프를 메고 직벽을 오르내리며 낮에는 루트를 개척하고 밤에는 일지를 적고 순서를 외웁니다. 등반에 필요한 몸을 만들기 위해 적합한 곳을 찾아다니며 동작을 연습하고 근력과 체력, 유연성을 단련합니다. 날씨와 계절을 고려해 등반 날짜를 정하고 나면 '루트 청소'가 기다립니다. 홀드와 크랙(등반 시 잡거나 체중을 실을 돌출부와 갈라진 틈)에 묻은 이물질을 확인하고 이끼나 부서질만한 돌들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죠. 마지막 단계는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 때까지 로프에 매달려 연습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리기도 하죠.

모두가 숨죽이는 알렉스의 프리솔로 등반은 이 과정이 없으면 이뤄지지 않습니다. '프리솔로는 사고 날 위험이 적다'는 주장은 이 준비과정을 전제로 나왔죠. '사소한'에서 시작해 '치명적인'으로 끝나는 부상세분화는 프리솔로 등반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추락이 죽음으로 직결되는 프리솔로 등반을 위해 알렉스가 고려해야 할 것은 사고가 나도 덜 다치는 환경이 아니라 사고 자체를 피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각종 장비의 하중과 거추장스러움이 배제된, 맨몸이죠.





재미있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알렉스 호놀드의 뇌가 일반인과 다르게 작동하는지 알기 위해 공포를 느끼는 레벨을 측정한 것인데요.

실험의 결과는 흥미롭게도 '그렇다'였습니다. 알렉스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높은 단계에서만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렉스가 죽음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알렉스는 인생을 대단히 이성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실제로 "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중앙선을 침범하거나 주사위를 던지고 싶지도 않습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결과와 위험을 구분할 줄 안다. 만약 프리솔로 등반 중 추락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최악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궁극적인 위험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과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난 프리솔로 등반에서 위험을 줄이고자 노력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행위가 대단히 위험하긴 하지만 난 추락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50p

(데이비드 로버츠의 챕터)



나는 공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공포 없이 등반하느냐(이것은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신경조직의 말단까지 스며드는 공포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공포를 느낀다. 만약 내 옆에 식인 악어가 있다면, 나는 매우 불안해할 것이다. 사실, 내가 이제껏 경험한 두 번의 끔찍한 공포는 나의 프리솔로 등반에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만약 이 두 번의 실패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미지의 세계에서는 사소한 일조차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89p

(알렉스 호놀드의 챕터)



위기를 갈구하는 모험가 이미지와는 달리 알렉스 호놀드는 차분한 성격의 완벽주의자입니다. 준비 과정 중 못 미더운 부분이 있으면 확신으로 바뀔 때까지 보완했습니다. 육체의 능력만으로 암벽을 오르는 프리솔로의 특징을 생각하면 이 보완과정은 대체로 스스로를 향해 있죠. 알렉스 호놀드는 앞서 언급한 하프돔과 엘 캐피탄의 '노즈Nose' 루트를 '연결등반(두 개 이상의 암벽을 한 번에 오르는 등반)'으로 6시간 만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프리솔로 방식은 아니었지만 대단한 기록임에는 틀림없죠. 이런 등반을 해내려면 선등한 하프돔을 걸어 내려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후등할 엘캡 아래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알렉스의 경우 직벽을 오른 6시간을 포함해 총 11시간을 '마라톤을 뛰듯' 움직였다고 합니다.

알렉스 호놀드를 만족시킬 준비과정은 11시간 동안 마라톤을 뛰듯 움직여도 지치지 않 체력과, 6시간 동안 직벽을 올라도 집중력을 잃지 않 정신상태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가 암벽 위를 '무덤덤하게'오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은 공포를 느끼지 않는 뇌가 아니라,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준비과정이었죠.





    게임의 댓가  


암벽등반을 위한 준비와 환경을 완벽히 갖추었다 하더라도 사고가 날 확률은 결코 제로가 되지 않습니다. 영상을 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 만큼 위험천만한 상황이 카메라에 찍힌 적도 있죠. 알렉스는 그 일을  별것 아닌 상황처럼 얘기했지만 결국 '게임의 일부'라며 위기였음을 인정합니다.



왓킨스 남벽 300미터 위에서 영상은 <얼론 온 더 월>의 '생크 갓 레지'위에서 만큼 유명한 장면을 보여준다. 프리솔로로 등반하던 알렉스가 3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서 카메라를 향해 다가온다. 바로 그곳에 볼트가 있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알렉스의 발이나 머리 위 높은 곳의 경사진 홀드를 잡고 있는 손가락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볼트를 향해 왼손을 뻗어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한다. 그의 손가락이 볼트에 닿을락 말락 한다. 그러나 데이지체인을 쓰면 볼트에 카라비너를 걸 수 있다. 그는 안전벨트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데이지체인을 빼낸 다음 그 중간 고리를 이빨로 물고 안전벨트에 걸린 카라비너로 손을 가져간다. 그때 갑자기 알렉스의 몸 전체가 아래로 살짝 흘러내린다. 발이 스탠스에서 미끄러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경사진 홀드를 오른손의 손가락만으로만 잡고 그 벽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언제 그가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추락에는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을까. 197p

(데이비드 로버츠 챕터)



수없이 연습을 반복해도 실패가 발생하는 구간이 존재합니다. 연습 땐 수월했지만 날씨 등의 변수로 난이도가 변하는 구간도 있죠. 암벽의 상황 때문에 루트를 변형하다 길을 잃어 패닉에 빠지기도 합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수위가 낮은 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300미터 높이 암벽에 맨손으로 매달려 있다면 얘기가 다르죠. 알렉스는 하프돔을 프리솔로로 오를 때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 때문에(재밌을 것 같다는 이유로!) 연습한 루트가 아닌 변형루트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알렉스에게 악몽을 가져다줍니다.



나는 어느 지점에선가 기존 루트를 벗어나 위로 올라가며 5.10의 변형루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헷갈렸다. 나는 풀이 난 곳을 올라가며 의구심에 빠졌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초크 자국이나 박혀 있는 피톤도 없었고, 심지어는 피톤이 박혔다 뽑힐 때 생기는 자국조차 없었다. 등반을 완전히 망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말 그대로 루트를 벗어나 지상 300미터 위의 하프돔 한가운데 지저분한 곳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지!" 88p



프리솔로 등반은 단 한 번 뿐이라는 이유로 실수를 눈감아주지 않습니다. 실수의 무게가 아무리 가벼워도 죽음이 놓여 있는 반대편 저울은 상승합니다. 알렉스는 '알렉스 무덤덤한 호놀드'라는 별명답게 당면했던 위기 심각지 않았다고 평했지만, 모든 이가 우려하는 치명적인 위기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을지는 본인조차도 모를 것입니다. 그가 하려는 시도가 가능한가를 시험할 재료는 오직 목숨뿐이고, 옳았음을 증명할 방법 역시 생존밖에 없으니까요.

게임의 승률을 아무리 높여두더라도 판돈이 목숨이라는 룰은 변하지 않습니다.





    일천미터 상공에서의 춤사위  


 이제 루트 전체가 그다음 네 번의 동작, 즉 가장 어려운 동작에 달려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왼손 옆에 놓고, 왼손 검지와 중지를 홀드에서 떼어 오른발 엄지발가락과 왼손 엄지손가락 사이의 장력으로만 버텼다. 그런 다음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물결 모양의 홀드 중 검지와 중지가 잡고 있던 곳을 밀어주면서, 왼손으로 왼쪽의 경사진 덩어리 홀드를 재빨리 낚아챘다. 나는 그 홀드를 쥐어짜듯 힘껏 잡고, 오른손을 다시 최초의 아래로 잡아당기는 듯한 미세한 홀드로 옮겼다. 나는 두 홀드 사이에 꽉 차게 걸리는 아이언크로스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오른발을 경사진 접시 모양의 스탠스에 놓고 엉덩이를 돌려 왼발을 작은 구멍에 넣은 다음, 오른손에 초크를 묻히고 덩어리 홀드 위쪽으로 옮겼다. 나는 무의식 중에 발차기 자세를 취했다. 왼발로 벽을 차면서 그 반작용을 이용해 버티기에 완벽한 자리의 작지만 아주 중요한 스탠스에 발을 옮겼다. 나는 왼손의 위치를 절묘하게 바꾸어, 두 손이 함께 홀드를 쥐어짜듯 잡아당길 때 보다 안전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마치 자동주행이라도 하듯 나는 왼발을 1미터 정도 멀리 직각으로 뻗었다. 그러자 발이 멀리 코너의 벽에 놓여야 할 자리에 정확히 위치했다. 필사적으로 시도해도 실패하기 일쑤였던 발차기가 이제는 스탠스를 쉽게 디디는 동작처럼 느껴졌다. 발은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몇 달간의 스트레칭이 결실을 맺어, 나는 발 옆의 크랙에 큰 어려움 없이 왼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오른손바닥을 아래로 밀어주는 동작으로 바꾸자, 왼발과 오른손바닥 사이에 균형이 잡히며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제 왼손을 위쪽의 양호한 바위 턱에 뻗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하여 나는 '볼더 프로블럼' 구간을 통과했다! 379p



알렉스의 가장 대담한 도전이자 동명의 영화 '프리솔로Free Solo (2018)'에서도 하이라이트로 다뤄졌던 엘 캐피탄의 '볼더 프로블럼Boulder Problem'을 통과하는 장면입니다. 읽고 있으면서도 알렉스의 움직임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군요. 저는 저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와 유튜브 동영상을 여러 번 시청해야 했습니다.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저는 때마다 수명을 덜어내는 기분을 느꼈죠.





공저자인 데이비로버츠는 알렉스의 등반 방식을 '이제 안전해'와 '이제 아니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대단히 힘든 정신적 춤사위라고 묘사했습니다. 또한 알렉스가 어둠 속에서 헤드램프 불빛으로 등반하는 장면을 허공 속에서 이리저리 춤을 추는 듯하다고 말하죠. 지켜보며 숨을 졸이는 사람의 마음과는 달리 알렉스는 가장 위험한 동작, 그러니까 신체 암벽이 닿아있는 지점이 작아질수록 가장 환상적인 기분을 느낀다고 합니다.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을 실행하면서도 마음속으론 환희를 느끼는 것이죠. 데이비드 로버츠가 받은 느낌은 정확했습니다. 알렉스 호놀드는 수백 미터 허공에서 암벽이라는 파트너와 춤사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약속된 동작이 어긋나면 목숨을 잃는 치명적인 춤사위죠.



 나는 손가락에 초크를 묻히면서 바싹 긴장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마 조금 흥분했을지 모르고,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 경각심이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

...

크럭스 동작에서 나는 머리 위쪽에 있는 날카롭고 작은 석회암의 언더 크랙이 매달렸다. 스미어링으로 댄 왼발의 작은 스탠스를 믿고, 오른발을 거의 허리까지 끌어올린 다음 왼손으로 멀찍이 떨어진 저그 홀드를 잡을 수 있도록 몸을 순간적으로 쭉 뻗었다.
 비록 그 루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은 아니었지만, 극도로 단순한 동작이 그 후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벽에서 살짝 멀어지는 순간 온몸이 공기에 휩싸이는 느낌, 이것이 나에게는 프리솔로 등반에서 가장 환상적인 순간이다. 이런 동작에는 장비를 사용하는 로프 등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순수함이 있다. 나는 그 간결한 동작을 몹시 좋아하지만, 그런 경지까지 가는 것이 결코 쉬은 일은 아니다. 233p



  


    사니Sanni Mccandless


프리솔로 등반가의 애인으로 사는 삶은 결코 추천만한 것이 아닙니다. 도전할 암벽을 찾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탓에 만나기도 힘들고, 데이트 장소는 대부분 산 아래에 주차된 좁고 지저분한 밴 안입니다. 알렉스가 등반할 때마다 심리적 압박을 견뎌야 하는 것도 물론이고, 알렉스 특유의 무덤덤한 성격은 가끔 오해를 낳기도 합니다.


위와 같은 문제로 이별을 반복하던 알렉스는 2015년 11월 시애틀의 한 사인회에서 사니 맥캔들리스를 만나게 됩니다. 녀는 알렉스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었죠. 그의 직업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등반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도 있었습니다. 그의 특별한 삶을 받아들이지 못해 갈등을 겪었던 지난 인연을 생각해보면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사니는 좁은 밴 안에서도 잘 지냈고 알렉스와는 달리 성격도 활달했습니다. 마침내 마음을 열고 사랑할 사람이 알렉스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죠. 등반도중 사니의 실수로 추락하기 전까진 말입니다.


2016년 1월, 파타고니아에서 어려운 등반을 성공시킨 알렉스는 들뜬 마음으로 시애틀로 돌아와 사니를 만납니다. 여느 때처럼 암장(등반 환경이 조성된 장소)과 캠핑장을 오가며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보내던 둘은 어느 날 고질라Godzilla라 불리는 암벽을 오르기로 합니다. 사니를 배려해 쉬운 코스에 안전장비도 갖춘 등반이었죠. 하지만 로프 길이를 착각한 사니의 실수로 알렉스는 아무 방비도 없이 4미터 높이에서 뾰족한 바위들 위로 추락해 버리고 맙니다. 재빠르게 응급처치를 받고 목과 척추에 이상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지만 알렉스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이 불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죠. 사니를 탓할 수는 없었습니다. 로프의 길이를 확인하고, 사고를 방지하도록 대비해야 했던 것은 그였으니까요. 알렉스가 화를 내고 싶은 대상은 사니가 아니라 사니에게 푹 빠져 지내느라 마음가짐이 느슨해진 스스로였죠. 그는 애인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사실에 겁에 질려 우는 사니를 바라보았습니다.

또다시, 사랑이 그의 등반인생을 발목 잡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알렉스를 우울하게 합니다. 사니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그의 등반인생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니를 속이며 등반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속이며 사니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알렉스는, 그녀가 멋지고 함께 있는 것이 정말 좋지만, 그것이 등반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는 자신하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사니는 대답하죠.



 "네가 다쳤다는 건 알아. 끔찍한 일이라는 것도, 하지만 혼자가 된다고 해서 네 기분이 더 나아질까?"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참 그러네." 사니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정말 미안해. 그렇다고 이 말이 네가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너는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훌륭한 클라이머가 될 수 있어. 너는 둘 다를 충분히 해낼 수 있단 말이야." 296p



2016년 11월 다큐멘터리 제작자 지미 친Jimmy Chin과 그의 스탭들이 알렉스의 엘캡 도전을 촬영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다는 이유로 알렉스 호놀드가 등반을 포기하는 장면이 촬영된 날이죠. '준비를 마친' 등반을 중도 포기하는 처음 있는 일일뿐만 아니라 그날 등반하지 못하면 시즌이 끝나버려 다음 도전까지 최소 몇 달의 공백이 생기는 상황이었습니다. 알렉스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오른발을 못 믿는 상태였고, 육체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준비가 덜 된 상태였음을 깨닫습니다. 알렉스가 경계했던 '깊은 생각'이 그를 잠식하기 시작하죠. 공포는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 덩치 키웁니다. 수십 번 오르내렸을 루트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촬영팀 앞에서 무섭다는 이유로 등반을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 고공행진 중이던 그의 등반인생에 선명한 오점이 생길 것입니다. '알렉스 겁에 질린 호놀드'

오기를 부려서라도 등반을 계속해야 할까.

어둠 속에서 그를 찍고 있을 카메라가 의식되기 시작합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초원에 서서 당황한 얼굴을 찍고 있을 촬영팀이. 어려운 구간마다 로프에 매달려 기다 카메라가. 그의 등반을 아래에서 지켜보던 이름 모를 클라이머 세 명이. 등반하기 전 인사를 나눈 친구가.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영상감독이.

해가 떠오르면 엘캡은 일천 미터짜리 오븐으로 변할 것입니다. 알렉스의 머리 위엔 다음 구간으로 향할 크랙과 다른 등반가가 박아 놓은 볼트가 있었죠. 선택할 시간이 당도했습니다. 알렉스의 머리에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더 떠오릅니다. 그의 밴에서 잠들어 있는 사니.  

알렉스는 손을 뻗어 볼트를 잡습니다. 반칙을 범했고 도전은 실패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면 다음 시즌까지 도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알렉스가 등반을 포기했다는 촬영팀의 무전이 귓가를 스칩니다. 하지만 알렉스에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산을 내려온 알렉스는 밴으로 향합니다.



그는 무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등반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나는 로프를 타고 계속 내려갔다. 내가 초원에 도착할 때쯤 날이 밝았는데, 촬영 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기분과 어떤 상황이었는지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분이 엉망진창이 된 나는 밴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사니를 깨웠다. 잠이 덜 깬 그녀가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괜찮아?"
 "괜찮아. 그냥 포기했어." 나는 카메라에 이야기를 마저 끝내기 위해서 밴의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사니가 밴에서 나와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335p



등반 도중 생긴 부상 때문에 사니와 등반 중 하나를 포기하려 했던 알렉스는 불분명한 가능성에 목숨을 거는 것보다 애인이 잠들어 있는 밴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내 그다음 해엔 엘캡의 정상을 프리솔로로 올라 등반과 사랑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사니의 말을 증명해내죠.

영화로만 봤을 땐 등반을 포기한 뒤 별다른 설명 없이 밴으로 들어가는 알렉스가 조금은 무책임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책을 통해 내막을 알게 된 후엔 등반을 포기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이해하게 되었죠.

한 사람의 성장은 천 미터 높이의 암벽 꼭대기뿐만 아니라 지저분한 밴 안에서 나를 믿고 잠들어 있는 연인을 통해서도 이뤄진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 같아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알렉스의 등반은 경이롭습니다. 수백 미터 직벽을 맨손으로 오르는 장면은 원초적이면서도 고차원적인 질문들을 떠오르게 하죠. 하지만 저는 알렉스가 문라이트 버트레스와 하프돔, 엘캡을 프리솔로로 등반하는 모습보다 사니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더 좋았습니다.

누군가의 성장을 목격하는 건 뭉클한 경험이죠.






등반가인 알렉스 호놀드와 인류학 작가 데이비드 로버츠의 공저로 이루어진 구성은 탁월합니다.

알렉스가 경험과 일지를 소개하면 데이비드가 배경지식과 해설을 덧붙이는 방식입니다. 때문에 알렉스의 생생한 현장감과 데이비드의 배경지식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등반용어가 생소한 독자도 책을 읽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책에 소개되는 장소나 인물, 등반 기술과 동영상을 찾으며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거든요.









매거진의 이전글 쓴다 쓴다 쓰는 대로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