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의 윤슬 Jul 26. 2022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2)

기자





    경계 boundary line



정체성을 의심받는 적국에게 함께하며 찍어 온 사진 효과적인 입장표수단었습니다. 사진은 돈벌이 수단 동시에 신분증었으며 가 추구하는 치관 미국 향 있음을 지치지 않고 말해줄 대변인이기도 했습니다.


헝가리 억양을 사용하며 연합군과 동행하는 적국. 장 생각에 사로잡힌 기자와 애인을 그리워하는 남자. 포커판에 끼어든 어리숙한 풋내기와 동료 시신에 렌즈를 들이대는 냉철한 사진가.

양립하기 곤란한 상황 사이에 있는 희미한 위치를 카파는 늘 사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매 순간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경계에 던져져 선택을 강요받지만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대신 모호한 정체성 자체를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것은 결국 카파가 살아온 삶, 살아갈 삶 역시 커다란 경계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세상을 충격에 빠트린 사진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Spanish Loyalist at the Instant of Death)>은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을 탄생시킨 동시에 죽는 순간까지 조작설에 휘말리게 했습니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그는 취재에 목숨을 건 용감한 종군기자인 동시에 공포에 굴복한 민간인이기도 했습니다.

'영원한 연인'이란 말은 로버트 카파를 위해 존재하는 듯 잘 어울리죠. 하지만 그 말을 완성시키는 대상이 여럿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기적 같은 찰나를 포착해내는 기자와 미심쩍은 사진가 사에 있었습니다. 대담한 군인과 나약한 민간인 사이에 있었습니다. 죽은 연인을 그리며 평생 결혼하지 않은 로맨티스트와 죽을 때까지 염문설을 뿌리고 다닌  에 있었습니다.





경계를 삶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카파가 경계를 대하는 태도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있었던 일은 상징적이죠.

공포에 짓눌려 해변에서 도망쳤던 카파는 모선으로 돌아와 혼절했습니다. 의료 수송선 엔 부상자와 시신뿐이었고 온전한 몸으로 돌아온 사람은 침몰한 장갑차에서 구조된 병사 한 명과 카파 외엔 없었습니다. 카파는 해변에 머무르지 않고 도망친 스스로를 겁쟁이라 칭하며 울먹입니다. 그가 지닌 태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죽음을 넘나들며 취재했던 일과 두려움에 굴복해 도망친 일을 같은 밀도로 기록한 사실 때문입니다. 카파는 생사가 요동치는 노르망디로 향했고, 취재했고, 도망쳤고, 기록했습니다. 기록 안에서 용기와 수치심은 따로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태도는 전장뿐만 아니라 애인 '핑키'와 주고받일들, 홀로 잠긴 고민에 대한 기록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됩니다. 

그에게 경계란, 걸을 길과 전할 사실이 있는 곳이지 판정하거나 해석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뜬 곳은 침상이었다. 벌거벗은 내 몸에 까칠까칠한 담요가 덮여 있었다. 목에는 '탈진, 신원 미상'이라고 적힌 종잇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카메라를 보고서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옆 침상에도 젊은 남자 한 명이 벌거벗은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그의 목에는 '탈진'이라고만 적힌 카드가 달려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겁쟁이였어."
 그는 공격 제1파 보병부대에 앞서 출동한 수륙양용장갑차 열 대에 탔던 병사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사람이었다. 장갑차는 모두 거센 파도에 휩쓸려 침몰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해안에 오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다. 나는, 나 역시 해안에 머무르지 못한 게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른다고 말했다.
 배의 엔진이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탄 배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내내 장갑차에서 살아 돌아온 그 병사와 나는 가슴을 치며 슬퍼하고, 우겨댔다.
 "비겁한 놈은 오히려 나야, 나란 말이야." 200p



한 사람이 감당할 삶에겐 초라하고 슬픈 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 지난 후, 남은 삶을 인류사에 헌신할 위대한 종군기자를 얻게 됩니다.








    기자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참담한 일들이 그러하듯 전쟁 역시 누군가에겐 기회가 됩니다.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적국 태생 사진가에게 군기자라는 역할은 전쟁이 가져다준 기회였습니다. 로버트 카파는 상황을 돌파하는 과감한 성격과 위기를 넘기는 낙천적인 태도로 기회를 성공으로 완성시켰습니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찍어 온 사진과 후일담은 카파가 설 위치를 다를 종군기자들과 구분시켰고, 그런 변화는 더 생생한 사진을 찍고자 했던 욕망과 시너지를 발휘했습니다.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카파는 군과 잡지사로부터 특별한 배려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장을 고를 수 있게 되었죠. 물론 카파는 언제나 가장 위험하고 치열한 전장을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군기자들보다 더 '배려받은' 환경에서 찍어 온 사진들은 동시대를 뒤흔들었습니다. 전쟁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주었고 삶을 전환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해서 그를 전쟁에 부합하는 인물로 규정하긴 어렵습니다. 로버트 카파는 전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전장에 어울리는 인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실 안에는 대충 급하게 짜 맞춘 관 스무 개가 놓여 있었다. 관 속에는 아이들이 잠들어있었다. 듬성듬성 꽃을 놓아 둔 관 밖으로 아이들의 지저분한 작은 발이 비죽이 삐져나와 있었다. 독일군에 맞서 싸울 정도의, 아동용 관에 안치하기에는 조금 많은 나이의 소년들이었다.
 그 나폴리 아이들은 총과 탄환을 훔쳐서 우리가 치운지 고개에 갇혀 헤매고 있던 14일 동안 독일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숨을 거뒀다. 바로 그 아이들의 더러운 발이 내가 유럽에 온 것을, 내가 태어난 유럽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진정으로 환영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동안 나폴리에 진입하는 길에서 보았던, 미친 듯이 환호하던 무리의 환영 인사보다 그 아이들의 상처투성이인 발이 더 진실한 것이었다. 135p



1943년 연합군과 함께 나폴리에 입성한 카파는 점령군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주민들을 보며 옅은 염증을 느낍니다. 그들은 승리하는 편에 재빨리 달라붙어 그들을 연호하고 방금 전까지 칭송하던 이들을 향해 침을 뱉습니다. 카파 그런 승리 '신랑 신부가 10분 전에 예식을 마치고 떠나버린 예배당 사진을 찍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무의미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군복만 달라지는 승패가 반복되는 동안 종군기자가  사진 역시 비슷해집니다. 매일매일 신문에 오르는 '비슷한' 전장 사진은 사람들을 참상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듭니다. 전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참상에 무감각해지고, 전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반복되는 승패에 적응했습니다.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허망한 마음으로 마을을 걷던 카파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치러지는 소년병들의 장례식을 발견합니다. 14일 동안 독일군에 맞서다 죽은 소년병 시신과 그 앞에 쓰러져 오열하는 어머니들을 본 카파는 전쟁이 말하는 승리가 진정 어떤 형태인지, 자신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지 깨닫습니다.

승리란 연합군 장군이 의전을 받는 동안 골목 뒤에서 치러지는 소년병들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승리란 크기도 맞추지 못한 관 밖으로 비죽이 삐져나온 상처투성이 발이었습니다. 승리란 아들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다 실신하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리고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는 승리가 황급히 감춰버리는 절망을 포착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습니다.

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로버트 카파를 시 끌어당긴 건 아이러니하게도 전 가진 진정한 면모였습니다.

그는 목격하고 경험한 비극들과 참상, 죽음, 패배, 공포 심지어 승리에조차 염증을 느낄 만큼 전장을 증오했지만 그곳에 사진과 글로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승리한 장군이 요청한 의전 사진과 초라한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소년병들의 장례식 사진을 같은 비중으로 세상에 알릴 기자 말입니다.






(3부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