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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May 25. 2023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고요를 동경하여 마침내 고요가 되다



추구하는 분야에서 경지에 도달함은 마치 산에 오르는 행위와 같아, 출발하는 곳은 제각각이어도 도착하는 곳은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양식정립한 건축가, 화풍정돈한 화가, 문체를 획득한 문장가가 내놓은 결과물은 공유하는 정서에 관계없이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 비슷한 밀도의 감동을 제공한다는 말이었다.


허수경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를 읽으며 멍하니 상상을 했다.

모두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비슷한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 그들이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형식과 길, 시간과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로 산을 내려가는 모습은 정상에 서 있는 모습과는 또 다른 형태로 감동을 선사하리라는 멍한 상상을.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 뒤, 한동안 나는 마당에다 꽃이나 약초나 채소들을 심는 데 열중했다. 꽃도 꽃이지만 우리나라 채소들을 심어서 먹고 싶었다. 교포 아주머니에게서 얻은 미나리와 깻잎, 고추와 갓을 나는 마당 한 귀퉁이에다가 심었다. 기다렸다. 갓에서 싹이 나오고 깻잎이 자라고 고추에 작고 흰 꽃망울들이 달리기 시작할 무렾, 우박이 내렸다. 갓김치에다, 깻잎장아찌에다, 고춧잎무침을 먹어보리라고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나는 우박이 내리고 난 뒤 마당 귀퉁이에 서서 울었다. 울화가 치밀었다. 약이 올랐다. 모든 게 다 꿈이었다. 그렇게 그런 것들이 먹고 싶으면 그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 이곳에서 사는 게 다 꿈이었고, 그곳으로 가는 것도 다 꿈이었다. 붙잡힌 영혼이여, 몸이 무거운가, 왜 이곳에서 그곳으로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가. 16p



글이 주는 감동은 기교도 형식도 문장도 단어도 아닌 진정성에서 비롯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체험하기는 힘든 사실을 목격하는 건 벅찬 경험이었다.


독자에게 닿기 위해 필요한 건 거창할 것 없는 진심감추지 않고 다가가려는,

어쩌면 다가가지 않으려는 태도가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평범한 일상을 보듬고 닦아낸 삶은 시로 기록되고, 차곡차곡 채워낸 시는 읽는 이마저 시인으로 만든다.

사무치는 그리움 처연한 향수鄕愁로 먼 땅, 의 고향에서 마침내 시로 완성되었다.  


그가 적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읽는 이를 위로해 주었듯,

누군가보낸 편지 역시 그에게 온전한 위로 남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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