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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Jun 23. 2023

일인칭단수

외야 잔디밭, 맥주 한 모금



노련한 요리사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는 별것도 없는 재료로 농후한 풍미를 가진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괴상한 재료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곤 합니다.  

능숙한 칼솜씨와 날카로운 미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만들어 낼 수 없는 요리는 때로는 북경오리 형태로, 때로는 회전초밥 형태로 "척"하고 테이블 위에 놓입니다.

 

별 이유도 없이 섹스하고, 문득 생각난 듯 자살해 버리는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양념맛을 보기 위해 '식당' 무라카미 하루키는 오늘도 문전성시입니다.





흠뻑 쏟아 겁게 적시는 장편과 달리, 그의 산문은 뭉게구름이 흐르는 날 툇마루에 앉아 마시는 소다수 같은 청량함이 있습니다.

수면을 부유하듯, 지면을 산책하듯.

등장인물은 독자 마음을 후벼 파지 않고 그들끼리도 예의 바르게 굽니다. 평온한 위치에 있는 독자를 긴장시키시 않고, 화자 스스로도 위태로운 상황은 멀리 경계합니다.


반듯하고 무해하고 정중요리. 


바에서 시비를 거는 생면부지의 , 노인을 등쳐먹는 사기꾼, 여자 이름을 훔쳐 욕망을 해소하는 원숭이, 절정에 다다르면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등장하는, 다소 당혹스러운 소재로도 하루키는 그런 요리를 합니다. 반듯하고 무해하고 한 요리를.






햇살이 상냥한 봄날 오후, 야구장 외야 잔디밭에 앉아 마시는 주를 상상합니다.



뭐가 어쨌건, 세상 모든 야구장 중에서도 나는 진구 구장에 앉아 있을 때가 제일 좋다. 1루 쪽 내야석 아니면 우익 외야석. 그곳에서 잡다한 소리를 듣고, 잡다한 냄새를 맡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좋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팀이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나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한히 사랑한다.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 -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147p



드넓은 잔디밭 씩씩한 선수들이 바삐 움직이고, 

하늘엔 고 둥근 공이 날아가고,

주위엔 이런저런 함성이 우렁차게 들려오고,

나는 외야 잔디밭에 비스듬히 누워 맥주를 마십니다.

중계석의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던 경기 스코어가 어떻게 움직이던 나는 나른하고 나는 한가롭고 나는 행복합니다.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없지만, 태양은 따듯하고 공기는 포근합니다.

삶이란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때로는 그 충분하지 않음이 삶의 한 지점을 만족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고맙게도 여전히,

하루키의 글은 삶의 한 구석에 고요한 형태로 갈무리되어 충분하지 않은 삶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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