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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Sep 08. 2023

후쿠오카, 밤



후쿠오카는 역설적인 도시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도시는 여러 겹의 과거와 현재가 얼기설기 뒤엉켜가며 미심쩍은 조화유지하고 있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헌 건물을 철거해야 새 건물을 지을 만큼 땅이 귀하지만, 후쿠오카는 도심지 한복판을 신사(神道)처럼 묵은 가치에게 기꺼이 내어주었다.

현지인들이 발길을 끊 장소를 외국인 관광객들이 '그곳 문화'라며 소비하고 있 동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글로벌 브랜드가 가득한 '현재의 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번쩍이는 도심을 둘러싼 외곽지역은 예스런 건물과 고요한 분위기로 공기부터 달랐다. 하지만  예스럼이 낡음이라기 보단 고색창연에 가까워서, 스스로의 존엄은 지키면서도 도심지의 생동감은 강조해 주었다. 사람들은 '일본'을 보러 후쿠오카에 가지만 정작 그곳에 있는 진짜 일본은 고요한 외곽지역의 평화를 간섭받기 싫어 적당히 도심지를 내어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백화점이쇼핑 거리를 가면 간판만 다른 한에 있는 기분이었다.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무인양품도 다이소도 그곳에선 여느 나라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상점이었다.

도심과 외곽뿐 아니라 낮과 밤으로도 도시는 선명히 구분되었다. 화창하고 한산한 낮 거리는 밤이 되면 농도 짙은 열기와 습기를 뿜어냈다. 점잖은 여인들이 입고 걷던 기모노의 용도가 달라지고, 인구밀도가 붕괴된 구도심이나 보일법한 풍경은 곳곳을 가득 메운 인파들로 모습바꾸었다.


나카스 강변가로 야타이가 북적대고 있었다. 서로를 모르는 이방인들이 어깨를 붙인 채 옹기종기 술을 마셨다. 열명도 못 앉을 협소한 공간임에도 호객행위를 하는 가게, 줄을 서는 가게가 있었고, 그 와중에 손님이 없는 가게도 있었다. 뜨거운 오뎅을 파는 가게였다. 뜨거운 오뎅이라니, 이 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포장마차에서 누가 그런 걸 앞에 두고 술을 마실까.

그런 상황임에도 잘 팔리는 메뉴로 교체하지 않는 고집이 놀라웠다. 조화를 중요시하는 일본 특유의 '와 문화' 일까. 어쨌거나 앉아있을 생각이 들지 않는 곳이라 별 고민 없이 그곳을 지나쳤다. 지나가다 아무 데나 내키는 곳에 들어가기로 한 여행이고, 하카타의 밤거리엔 '내키는 '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넓고 밝은 내부가 마음에 들어 들어간 곳은 다양한 향과 소리가 뒤섞인 활기찬 식당이었다. 점원에게 추천하는 메뉴묻자 곱창전골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곱창전골유명한 후쿠오카에서 곱창전골을 추천하는 식당에 들어왔지만 나는 팔팔 끓는 무언가를 앞에 두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명란젓과 계란말이를 고른 뒤 미타케를 주문했다. 이어 교자와 닭날개구이를 먹 서비스로 나온 산토리와 추가로 주문한 닭껍질꼬치 접시마저 말끔히 비웠다.

두 번째 '치요짱'이라는 선술집이었다. 가게 이름인 치요짱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재떨이를 가져오길래 사양했더니 그걸 본인 앞에 두고 담배를 피웠다. 치요짱이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며 미타케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다음은 야키니쿠 집이었다. 이렇다 할 간판도 특징도 없는 가게였다. 나이 많은 아저씨 둘이 운영하는 집을 발견하면 지나치지 말라는 조언이 떠올라 들어갔고 조언은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담배 연기와 고기 굽는 연기가 뒤엉켜 가게 안은 자욱했지만 누구도 불편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세 번째 가게에서 나온 뒤 기를 달랠 겸 강변을 따라 산책을 했다. 여름 기온은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지만 강바람은 제법 너그러워져 있었다. 다리 위에 멈춰 서서 강을 라보았다.

멀리서 크루즈가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구름가렸는지 달은 보이지 않았다. 러나 요리 전문점이라든가 횟집, 바, 카페 불빛과 건물 위에 설치한 옥외간판들이 하늘과 수면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크루즈가 그 것들로 채워진 빛의 수면을 가르며 다가오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파동에 일렁이며 형태가 망가졌던 불빛들은 크루즈가 지나간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와 수면 위에 단단히 달라붙었다.

마음속에 풍경소리가 들렸다. 스미요시 신사의 풍경이었다. 따르랑... 따르랑... 풍경은 바람이 아닌 물결을 따라 속삭이듯 노래하고 있었다. 다리 난간에 기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곳 밤공기가 호흡에 실려 들어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가는 나카스 강너머로 타워크레인 불빛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위로 쪽빛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와 스미요시 신사의 풍경(風磬) 위로 내려앉았다. 후쿠오카의 밤이 후쿠오카의 낮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있었다. 수면 위 동에 일렁이듯, 나는 기타 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하얀 민소매 셔츠에 검은 청바지를 입은 여인이 의자에 앉아 커다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밝은 갈색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그 위에는 까만 모자를 쓰고 있었다. 노래하몸을 움직일 때마다 동그란 귀고리가 상점가의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노래를 듣던 사람들이 기타 케이스에 동전이나 지폐를 넣어주면 그쪽을 향해 웃으며 답례했다.

이따금 고음 파트를 부르면 고개를 옆으로 숙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목에 걸린 펜던트도 조금씩 움직였다.

나는 난간 근처에 앉아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目が覚めればいつも
変わらない景色の中にいて
大切なことさえ 見えなくなってしまうよ

눈을 뜨면 언제나 같은 풍경 속에 있어서
소중한 것마저 보이지 않게 돼버려요

生きてる意味もその喜びも
あなたが教えてくれたことで
「大丈夫かも」 って言える気がするよ
今すぐ逢いたいその笑顔に

살아있는 의미도 그 기쁨도
당신이 알려준 것 때문에 '괜찮을지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당장 만나고 싶어요 그 미소를

あなたを包むすべてが
やさしさで溢れるように
わたしは強く迷わず
あなたを愛し続けるよ
どんなときもそばにいるよ

당신을 감싸는 모든 것이 상냥함으로 넘치도록
나는 강하게 망설이지 않고 계속 당신을 사랑할게요
언제나 옆에 있어요

当たり前の事は
いつでも忘れ去られがちで
息継ぎも忘れて
時間だけを食べてゆく

당연한 것은 언제라도 쉽게 잊혀지기에
호흡도 잊고 시간만 흘러가

花の名前も 空の広さも
あなたが教えてくれたことで
愛と呼べるもの 分かった気がする
せわしなく進む 時の中で

꽃의 이름도 하늘의 넓음도
당신이 가르쳐주었기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알 것 같아
빠르게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わたしの生きる世界が
光で満たされるように
あなたの生きる時間を
わたしが輝かせるから
離れていてもそばにいるよ

내가 사는 세계가 빛으로 채워지도록
당신이 사는 세상을 빛으로 채워줄 수 있도록
떨어지더라도 함께 있어요

雨に打たれても 風に吹かれても
寒さを感じない 今は
ぬくもりはいつも
この胸の中に
決して失くさないよありがとう

비를 맞아도 바람을 맞아도 지금은 추위를 느끼지 않아요
온기는 이 가슴속에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고마워요

巡る季節の中でも
この手を離さないでいて
二人を繋ぐ思いが
決して色あせないように

돌고 도는 계절 속에서 이 손을 놓지 말아요
둘을 잇는 마음이 결코 빛바래지 않도록

あなたを包むすべてが
やさしさで溢れるように
わたしは強く迷わず
あなたを愛し続けるよ
どんなときもそばにいるよ

당신을 감싸는 모든 것이 상냥함으로 넘치도록
나는 강하게 망설이지 않고 계속 당신을 사랑할게요
언제나 옆에 있어요

離れていてもそばにいるよ

떨어지더라도 함께 있어요



노래를 마친 여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기타 줄을 조했다. 두 번째 노래는 서서 부를 생각인 듯했다. 기타 케이스에 천 엔을  조용히 박수를 보냈다. 여인이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와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동안 떠올랐던 생각과 감정들을 적어둔 메모장이었다. 언젠가 글 정리해 선물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여름밤 반딧불이처럼, 겨울아침 눈송이처럼, 찰나를 스치는 감정을 붙잡아 간직하려는 욕망이 글이라는 사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원 물에 잠겨 폐허가 되었다. 그 글들은 뿌연 유리가 서 있는 폐허 속 여기저기로 흩뿌려져 있었다. 움켜쥐어봤자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갈 뿐이었다. 음부터 없었던 처럼 그 모두가 허무로 가라앉고 있었다.

여인이 두 번째 노래를 시작하고, 나는 메모장에 적은 글과 전송하지 않은 문자메시지를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메모장엔 사랑의 중추에 이른 자의 환희가, 문자메시지엔 이별의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의 낙담이 적혀 있었다.

창고에 방치 식 먼지를 닦아내듯 담담히 글을 읽고 스마트폰을 닫았다. 하얀 자전거 한 대가 무심히 앞을 지나갔다. 청바지를 입은 남녀 한쌍이 그 뒤를 따랐다. 남자는 몇 걸음 앞에서 뒤돌아 걸으며 여자와 이야기 중이었고 여자는 그의 얼굴을 보며 보폭을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눈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미세한 먼지 입자가 상가 조명 속에서 반짝였다. 눈을 감았다. 희뿌연 유리 속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꽃의 이름도 하늘의 넓음도
당신이 가르쳐주었기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알 것 같아



곡을 쓴 이는 그때 떠올렸던 이와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까. 부질없이 흩어지는 감정이 아쉬워 노래에 새긴 마음은 여전히 거기 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반복되는 저녁노을이 언제나 감정을 두드릴 수는 없듯, 순간을 기적으로 바꿔놓는 마력은 멋대로 사람을 뒤흔들어놓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강이 흘러 바다로 향하 처럼 것은 정당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일렁이는 빛의 수면처럼, 바람을 따라 노래하는 풍경처럼, 아래를 통과하면 과거가 되는 토리이 저편처럼.

붙잡아 둘 수도, 오가게 할 수도 없는 그 모든 순간과 감정들 양분 모했기에 사랑은 결실을 맺어 꽃을 틔운다. 

그 꽃이 이별이지라도.


폐허에 가라앉아 희뿌연 유리를 들여다보는 짓은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제까지나 그곳에 남아 령처럼 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던 먼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텅 빈 공간바라보며 직이  내.

그 꽃이 이별일지라도.

메모장에 있는 글을 삭제했다. 임시보관함을 정리했다.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을 삭제하고 기념일이 적힌 캘린더도 지웠다. 온 우주를 물들였던 지난날들이 몇 분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폐허의 바닥에서 몸이 떠올랐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유리를 보며 릿한 통증을 느꼈다. 밤을 히던 기타 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도 언젠가는 끝이 나는 법이다.


"좋은 노래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いい歌を聞かせてくださって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기타 케이스에 두 번째 천 엔을 넣고 말했다.

빙그레 웃으며 "아리가토오"라고 말한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숙이며 내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나요? (どこから来ましたか?)"


잠시 멍하니 있다, 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폐허에서 왔습니다. (廃墟から来ました.)"


"에에?" 눈을 동그랗게  그녀는 과장된 몸짓으로 내 옷차림을 살폈다. 어이없는 농담을 다고 여기는 듯했다.

마음속에서 '폐허'를 설명하고 싶은 욕망 일었다. 그렇게 하면 이 여행과 내 기분이 몇 배는 더 좋아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서지는 걸 반복한 끝에 위태롭게 형된 결론을 서툰 외국어로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공연가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는 노릇이다.

"쟈아" 내가 손을 흔들자 그녀도 더 묻지 않고 "쟈아" 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나는 다시 나로 돌아간다. 이별은 여전히 이별이고 외로움 또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어디를 걷고 있어도, 어떤 공기를 마시고 있어도 그건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슬프면 속 편하게 슬퍼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떠오르면 떠올리고, 마음이 무너지면 울겠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빌어주고, 추억을 하고, 나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조금씩 다른 생각들로 마음을 채워나가겠다고 생각했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나는 걷고 있는 사람이고, 계속 걸어가면 된다.

돌아와야 하기에 여행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떠나기 전 공항 창을 바라보며 나는 어렴풋이 그 사실을 납득하고 있었다. 그러, 같은 이유로 이별 역시 무엇도 바꿔놓지 못할 것이다.

부유하던 먼지처럼 순히 생각은 없었다. 밤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 내일 일은 내일 일어나서 면 된다. 몇 달 만에 돌아온 허기는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강을 뒤로하고, 나는 열기를 내뿜는 나카스 거리로 걸어 들어갔다. 구름이 제법 두터운지 달은 여전히 모습을 감췄지만 밤하늘은 더 깊은 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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