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쉼 없이 요란한 텔레비전 소리도
공간을 채우는 가습기 소리도
재잘대는 카톡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나를 둘러싼 공기밀도 속으로 침몰하는 날
누구는 여행을 갔고
누구는 모임에 갔고
누구는 가족과 있음을 알고 있는 날
그래서 내 고요를 아무도 모르는 날
철 지난 잎사귀 하나하나
나직한 바람에 서성이는 모습을 내다보며
하루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날
슬리퍼 신고 편의점에 다녀와 물을 끓이며
어제보다 차가워진 거실 윗공기를 느끼는 날
커다랗고 비싼 창이 차단하는 소음이 궁금한 날
그토록 원해왔던 완전한 공간이 낯선 날
그런 날이 있다
열심히 달려왔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지만
어디로 달려가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는 날
몇 해나 키웠지만 꽃 한 송이 보여주지 않는 화초를 재촉하기 싫은 날
이 또한 지나가리라
결국 다 잊혀진다
누구 좋으라고 그런 말만 대접받느냐는 심술에 목이 메는 날
깊은 숲을 빛내던 등불 중 몇 개가
돌보지 않는 사이 영원히 꺼져버렸음을 발견하는 날
그런 날이 있다
취하지도 않는 혼술 토닥토닥 채우며
멀어진 나날도
흘러간 이들도 아닌
거울만 들면 볼 수 있는 나를 그리워하는
그런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