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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희 Jan 12. 2023

실패한 정답



창밖의 백합나무 잎사귀들이 그악스럽게 그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는 4월이다. 또다시 봄이라니. 사람이 오십여 년을 살다 보면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들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을 유혹하는 벚꽃의 요사스러움도 마뜩잖고 헐벗었던 나뭇가지들이 싹을 틔우고 잎을 키워가는 모습에도 진저리 난다. 숨 쉬고 있는 모든 것들의 생에 대한 갈망이 응어리진 봄의 생기는 나를 병들게 한다. 

 


사무실 책상 한편에 놓여있는 카시오 JS 계산기는 이십여 년 전 세무사 시험에 합격한 날 아내가 선물한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먼지가 쌓이고 여기저기 닳고 말았지만 이 계산기와 함께 연봉을 늘리고 경력을 쌓으며 지금의 세무사 사무실을 차릴 수 있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었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랬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내 삶을 부정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제 역할을 못 한다고 힐난했다. 나는 영혼을 도둑맞은 채 표류하는 배처럼 시간 위를 떠다니고만 있다.



 “이혼서류 접수했어요. 당분간 여행을 좀 할까 해. ……당신, 타성에 젖어 착각하는 거야. 이건 사랑이 아니야. 우리를 버린 건 당신이야.”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 아내의 목소리는 아타카마 사막의 모래알보다도 건조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숨소리에서 딱 한 방울만큼의 물기를 건져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을 뿐이다. 전화는 끊어졌고 내 안에 있는 뭔가도 툭, 끊어지고 말았다. 그랬는데, 어째서 내가 버림받은 기분이 드는 거지. 나는 봄이 싫다. 계산기의 버튼을 꾹꾹 누르며, 나는 봄이 싫다고, 버림받은 건 나라고, 정답을 도출하라고 발악해 보지만, 세상은 그저 그악스럽게 푸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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