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남편은 웃통을 깐 채 코를 골고 아이는 그 옆에서 이제야 완전히 잠이 들었다. 자는 척을 하고 있다가 일어나 남편의 베개를 받쳐주고 가습기에 물을 새로 채워 켠다.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 갖고 놀다 흩트려놓은 장난감들을 정리하고 아이의 물통과 우유병을 닦았다. 그다음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쥐어줄 음식물 쓰레기를 묶어서 베란다에 내어놓는다. 우리 집은 작기도 작은 데다 안방 겸 거실이 한 공간이 되어버린 독특한 구조라서(문이 없어진 채로 그냥 사는 중 ) 버리기 직전의 꽉 찬 음식물 쓰레기를 부엌에 두고 잠들면 새벽녘에 불쾌한 냄새 때문에 잠이 깨버려서 늘 이렇게 해야 한다. 빨래 건조를 위해 켜 둔 제습기의 꽉 찬 물통을 비우고 냉장고를 열어 식 재료를 빠르게 훑어보며 다음 날 식단을 짜 본다.
코감기가 심하게 와서 이 병원 저 병원 애를 데리고 전전하길 일주일이 넘었고 여전히 침을 삼킬 때마다 끈적한 것이 영 기분 나쁜 덩어리가 힘겹게 넘어간다. 눈은 후벼 판 듯이 뜨겁고 독한 약 때문인지 속이 울렁이며 피로가 더 몰려온다. 그럼에도 잠든 가족의 모습을 뒤로하고 덩그마니 이것저것 정리하는 집안의 정찰병인 엄마의 자리. 잠들면 누가 엎어가도 모르던 나인데 이제는 잠결에 종종 치대는 아이를 달래다 보니 깊은 잠에 못 든 지 오래다. 마지막 어금니 이앓이와 때 이른 더위까지 더해져 아이가 꽤나 칭얼대서 요 며칠은 새벽 시간이 고되다. 꿀잠을 자다 번번이 깨는 게 더 힘들어서 차라리 책을 읽다 늦은 새벽이라 해야 할지 이른 아침이라 해야 할지 애매한 시간에 잠이 들기로 했다.
책을 읽다가 코가 불편하여 손을 댔는데 왼손 두 번째 손가락 마디에서 마늘 냄새가 풍긴다. 매일 씻어도 매일 하는 요리로 계속 덧대지며 결혼 5년 차에 제법 은근히 냄새가 잘 베여드는 손가락 한 마디. 때론 고춧가루 풋내나 생선 또는 오징어 냄새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마늘 냄새가 난다. 엄마랑 살 때 엄마 손이 내 얼굴에 닿을 때 가끔씩 "어우 웬 마늘 냄새야? 손 안 씻었어?"
"어이구 씻었지 왜 안 씻겠어."
" 에이~ 제대로 안 씻은 거겠지. 많이 나는데?"
이런 대화를 한 기억이 난다. 이제 그 냄새가 제대로 씻고 안 씻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아간다. 예전에 모유수유를 하고 아이가 툭하면 내 품에서 토를 하던 때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내게 코를 킁킁대던 남편이
"이제 니 몸에서 우유냄새가 나."
라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엄마로 살아가며 젖 냄새가, 밥 내음이, 마늘 냄새가, 아기똥 냄새가, 인내가, 사랑이, 헌신이-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많은 것이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베어 간다.
며칠 전 문화센터에 아이를 위한 일일특강을 다녀왔다. 거의 두 달 만에 가는 수업이다. 아이는 늘 어쩌다 오다 보니 좀 어리둥절하다가 재밌어하며 느지막이 흥이 오르는데 수업이 금세 끝나버리니 못내 아쉬워 좀 징징대다가 나오곤 한다. 주 2회 이상 정규 수업을 등록하고 꼬박꼬박 잘 다니는 엄마들도 많고 차라리 어린이집에 보내는 엄마들도 많은데 나는 애매하게 바쁜 포지션을 취하며 이도 저도 아닌 엄마 중 하나다. 여기서 '차라리'라는 말이 좀 중요한 지점인데, 19개월 아이를 집과 공원, 주말 나들이로만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공원에서도 아무리 공을 던져주고 숨바꼭질을 하고 자동차 놀이를 하며 난리를 쳐도 주변에 또래 아이만 나타나면 게임은 끝난다. 그저 또래 아이를 따라다니며 즐거워하는 딸을 보면 복잡해진다. 공부가 흐지부지 되었으면 애랑 잘 놀기라도 해야 하는데 솔직히 할 만한 게 없고 흥미가 안 나다 보니 머리로는 아는 것들이 잘 구현되지 않는다.
어쨌든 늘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냐고, 음악에 리듬도 잘 안 타던 네가 아이가 틀어둔 동요에 사정없이 몸을 흔들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해가며 아이를 웃겨주고 있지 않냐고, 솔직히 지루한데도 아이에게 맞춰서 놀아주지 않냐고,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을 하는 중에도 어른 밥은 물론 아이 삼시 세 끼는 따로 간식까지 다 만들어 먹이잖아, 아이 목욕도 주중엔 남편 안 시키고, 남편이 집안일은 좀 놔두라고 말하는데도 거의 다 혼자 하잖아, 언제나 집이 깨끗한 편이지 등 애써 그나마 자신 있게 말할 만한 몇 가지를 늘어놓으며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어쩐지 부족한 엄마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좀 혼란스럽고 침울해질 때가 있다.
반성이란 걸 모르던 내가, 이상하게 자꾸만. 출처 : 채니 N요니
나름대로 굳이 맘 카페 활동을 하며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친구를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다. 욕심껏 양손 가득 친구란 걸 담아봤지만 몇 걸음 걸으니 우수수 미끄러져 나가고 이제 어울리는 엄마는 몇몇이 전부다. 아이 개월 수, 성별 및 성향, 엄마들끼리의 성향 및 전반적인 가정생활(남편과의 관계, 가정생활에 대한 만족도 등)이 얼추 다 맞아야 관계가 무난하게 이어지는 데(특히 가정생활이 비슷한 게 가장 중요하다! 일종의 사건을 겪으며 몸소 깨달았다.) 이게 맞으면 저게 안 맞는 식으로 아쉬운 경우가 많다. 전반적으로 무난하다 싶으면 동네가 조금 멀거나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녀서 생활리듬이 달라 자주 보기 힘들거나 엄마들과만 만나게 된다.
짧게는 이십여 년 길게는 사십 년 정도를 각자의 문화와 방식으로 살다가 결혼 하나 했다고 해서 화목하게 산다는 건 기적이듯 아기 엄마들 역시 어느 한 동네에서 육아를 한다는 공통점 하나 있다고 해서 느닷없이 진짜 친구가 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일종의 사건을 겪기도 했고 몇 해를 넘기며 이렇게 자조적인 입장이 되어버려 더 이상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려 애쓰기 싫어졌다. 이런 내 마음은 모른 채 아이는 또래 아이들만 보면 흥분한 강아지처럼 촐랑대곤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부족함을 하나 예로 들면 책을 읽어줄 때 일단 시작은 기특하게도 지가 먼저 책을 들고 와 읽어달라고 들이밀며 작정하고 내 옆에 딱 붙어 앉는다. 그 모습에 한껏 고무되어 한 문장 한 문장 나로선 매우 어색하지만 최선을 다해 엄청 과장된 어조로 읽어보지만 금세 아이는 두꺼운 종잇장을 파닥파닥 힘주어 넘기는 장난만 해댄다. 인내심을 발휘하여 몇 번은 꾸역꾸역 읽어주다가 결국 나도 아이도 책을 떠난다.
만약 어린이집이었다면?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다. 애들이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더욱 전문적인 기술로 읽어주는 까랑까랑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보다 더 오래 집중했을 것이다. 아무튼 책이 아닌 그 무슨 활동이든 또래 애들과 갖가지 같은 목적으로 계속 상호작용하는 것만으로도 집에서 달랑 나랑만 있는 것보다 낫다. 단, 집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사건사고가 단체에서는 더 크게, 타인에 의해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문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문제보다는 아이가 집에만 있다는 게 더 큰 문제 같아 국공립 어린이집에 전화를 해봤다. 입소하려면 소위 '엄마의 점수'가 필요한데 맞벌이인 상태에서 둘째를 가진 후 산부인과에서 서류를 떼 오면 1순위에서도 높은 점수가 된단다. 일단 재택근무로 맞벌이는 충족. 어린이집 원장과 이야기 끝에 둘째를 올해 안에 가지는 조건으로 대기를 걸어두었다. 말로만 계획 중이던 둘째는 이제 기한부 숙제가 되었다.
괜히 신나던 5월도 마지막 주가 다가오고 서서히 정신줄을 잡을 때가 된 것 같다. 온종일 대기가 정체되어 아무리 창문을 열어봐도 바람 한 줄기가 없던 어제의 날씨처럼 한동안 책상 구석에 노트를 치워두고 그간 조금 했던 맛보기 공부마저 가물가물해가며 정체기를 겪었다. 오늘은 또 사정없이 나무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흔드는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주말 아침 혼자 미용실에 앉아 그 바람결을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도 다시 바람을 불어넣자고 다짐해본다. 다시 노트를 펼치고 교재도 준비해서 제대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귀찮아 미루던 법조문 정리도 시작해야겠다. 집에만 있는 아이를 보며 뭔가 꼬여있던 혼잡함도 차분히 풀어가 보련다. 어린이집 정식 입소 대기 전에 가끔 시간제 보육을 이용하는 것을 생각중이다. 아이랑 계속 부대끼며 좀 멍해지다가 이렇게 불현듯 정신 차리며 계획을 짜고 앉았는 걸 보니 역시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사장님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적으로는 뭔가 노예가 된 기분이 자꾸 들긴 해도 육아는 물론, 집안의 모든 살림을 아이를 기준으로 틀을 다시 짜며 대소사를 아울러 처리해간다. 커버 사진처럼 예쁜 카페 하나 갖고 싶다 말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렸지만 그 카페 사장님들이 예쁜 구두 안에서 피 흘리는 아픈 발이나 다름없는 경우도 많다. 보람과 번창도, 반성이나 재정비도 결국 다 사장님 몫인 작은 가게들처럼 사장이라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대단하게 보임과 동시에 늘 끙끙 앓고 압박을 느끼는 엄마의 자리. 남편은 공동대표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같이 모든 걸 논의하더라도 현장(아이가 있는 장소나 상황으로 해석)에서 발품을 팔고 실행하는 자는 엄마인 경우가 많아서 남편은 세월이 갈수록 사실상 자문위원이 되어간다.
사회생활 10여 년을 하는 동안 어디 한 군데 진득하게 눌러앉지 못한 터라 사장은커녕 팀장도 못해봤는데 사장이라니 좋지 아니한가? 피 흘려도 사장인 게 낫다는 생각으로, 아주 뚜렷하게 내 성취물로 드러난 아이들을 어엿하게 번창시켜 보는 것이다. 어느 광고 카피로 보던 '아이와 함께 부모도 자란다'는 식의 말들은 정말 맞는 말이다. 고작 아기 엄마가 된 게 전부인 건가 생각하던 때도 있지만 이제는 사장님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또 은근히 자부심이 생기며 해볼 만한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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