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쾌한T맘 Mar 05. 2019

인간, 가끔 위대하지만 대체로 웃기고 짠한 그들

김동식 <회색 인간>을 읽고

 나와 같은 나이의 한 노동자가 고된 일을 하면서 300편이 넘게 쓴 글들이 온라인상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 중 24편의 이야기들이 엮어져 소설집이 나왔다. 일단, 김동식 작가와 그의 단편 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한 때 뭘 읽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은사님의 카카오***에 이 책이 올라와 있었고, 몇 가지 정보를 검색해보니 꽤나 이슈화 돼 있는 최근 작품이란 걸 알게 됐다.


 이미 아는 작가의 작품 안쪽의 맨 앞에 실려있는 프로필에서 확인하는 것은, 그 작가의 작품 중 읽은 것과 안 읽은 것을 구분하는 정도이다.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프로필을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다른 작품도 궁금해질만큼 책이 좋았다는 뜻이다. 김동식 작가는 이제 막 탄생했고 프로필이 길지 않은 젊고 평범한 노동자이다. <회색 인간>을 다 읽고 프로필을 다시 보게 됐다. 김동식 작가의 글은, 우연히 특이한 음식을 약간 불안해하며 먹어봤는데 그게 너무 맛있어서 또 먹고 싶어 지는 그런 맛다.



- 회색 인간 - 중에서

지칠 대로 지친 이곳의 회색 인간들에겐 땅을 팔 수 있는 회색 몸뚱이만이 가진 전부였고, 남들도 그래야만 했다. 한데 그 여인은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아 굶어 죽어가던 그 여인이, 또다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인간이 동물과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는 예술이나 문화를 향유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이 밑바닥으로 추락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비정상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들은 그저 배고픔을 느끼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라고 강요하는 다수들이 있다. 극한이다 싶어도 빌어먹을 놈의 희망을 놓지 못한 채 또 넘고 넘는 극한의 나날들 중에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려는 소수가 생겨난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추구하려고 할 때, 그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많은 경우 묵살당하거나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심한 경우 폭력을 당한다. 전쟁(식민지화)이나 그와 비슷한 상황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대기업의 조직문화 강요도 인간다움과는 거리가 멀고 부품화에 가깝다. '회색'이라는 무난함, 획일화의 상태에서 결국은 인간다움을 회복하여 색깔을 찾아가는 인간들의 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 디지털 고려장 -중에서

  참 신기하게도 똑같았다. 현실에서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던, 신경 쓰지 않던 그 모습들이, 가상현실에 모셔두고도 똑같이 나타난 것이다.


 작품 속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참신하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발췌를 최대한 짧게 했다. 제목만으로도 '아 ~뭔 내용인지 알겠네.'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뭘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기발하고 묵직하다. 한 편의 공상과학영화를 보는 듯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엄마가 중학생일 때, 영어 선생님이 수업마다 간간히,

'머지않아, 쌀을 씻어 넣고 기다리면 밥이 되는 세상이 온다.' 그런 말들을 해서 괴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나는 '밥이야 당연히 밥통이 하는 거지.'라고 웃어넘겼는데 세상은 그렇게 상상이 현실이 돼가며 변해가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발전한다 해도 언제나 노인은 있다. 가상 사회나 가상현실에 가족을 둘 수 있는 발전된 사회가 되었음에도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지금의 현실과 다를 바 없는 모습들의 인간들을 보게 된다. 내가 현실에서 가상으로 보내는 입장도, 보내어지는 입장도 모두 불편한 문제이다.


-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들 - 중에서

  20년 전, 한 외계인이 지구로 관광을 하러 찾아왔다. 통일 인류의 정부는 외계인을 극진히 대접해주었고, 만족스럽게 지구 관광을 끝낸 외계인은 정부에 한 가지 선물을 두고 갔다. 영원의 구. 이음새 없이 정교하게 원형을 이루고 있는 금속 재질의 물체였다. 그 영원의 구 덕분에 인간들은 영원히 늙지 않게 되었다. 30살은 영원히 30살이었고, 20살은 영원히 20살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늙지 않는 것은 좋았지만, 성장 또한 멈춰버린 것이다. (생략) 영원의 구는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젊음을 의미했지만, 누군가에겐 영원한 정체를 의미했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을 했다가 노화하며 영원한 안식, 죽음에 이르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자신이 갓난아기로만, 정신 사나운 사춘기 시절로만, 노동으로 탈탈 털리는 중장년층으로만, 오늘내일하는 노인으로만 정체되어 있어야 하는 상황은 정말 끔찍하다. 고군분투하며 그 상황을 타개하려는 삼총사가 있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읽다 보면, 역시 인간은 진실을 알게 됐을 때보다는 잔뜩 열이 올라 희망을 갖고 있을 때가 차라리 살 만하다는 것, 그리고 곳곳에서 그런 점을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입안이 쓰다.


- 어린 왕자의 별 - 중에서

참 희한한 일이었다. 벽이 생기고, 집이 생기고, 보이지 않는 공간이 생기자, 범죄도 생겼다. 폭력, 도둑질, 성추행, 예쁘게 지은 남의 집을 몰래 먹어버리는 일까지. 왜 일까? 사방이 모두 뻥 뚫려 있던 그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원시의 그때는, 모두가 모범 시민이었는데. 아무튼, 사람들은 참 재미있게 살았다. 아무것도 없는 심심한 별에서도 별별 일들을 만들며 참 재미있게 살았다. 자신들이 이곳에 왜 끌려와야 했는지를 까맣게 잊은 사람들처럼.


 과연 인간이 우주까지 통틀어 가장 우월한 생명체일까? 갑자기 어느 날, 어느 곳에 떨구어지든 인간이란 또 적응하고 또 체계를 만들고 사회를 구성한다. 그 사회성이 다행이기도 하지만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인간은 '아무튼 잘 산다.' 언제나 결국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급마무리되는 동화 같은 인간의 삶이다.


- 사망 공동체 - 중에서

하지만 이제 목숨의 값이 평등해졌다. 돈 한 푼 없는 노숙자 한 명이 죽는 것으로 수백억 부자가 죽을지도 모르는 세상이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가진 자들이 그러지 못한 자들보다 훨씬 더 떨었는지도 모른다.


 이승에서의 죽음과 저승에서의 탄생은 맞물려있다. 탄생뿐 아니라 살고 싶은 모습마저 맞물려있다. 이승에서의 삶의 환경이 좋아져 죽는 사람이 줄어드니 저승은 인구가 부족해서 시달리다가 저승의 대표가 어떤 결단을 내려 이승에 내려왔다. 죽어서도 사회의 존속을 위해 머리를 싸매는 인간의 지독한 사회성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승에서는 그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초고령 노인, 중증환자, 지독하게 망한 사람, 장애의 수준이 심각한 사람 등등 그 어떤 이도 진심으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말로는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내가 감히 그중 어떤 상황도 겪어보지 않은 채, '솔직히 그래도 살고 싶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20대 후반에 갑자기 중병에 걸려 1년 넘게 투병을 한 적이 있다. 희망적이지 않은 완치 확률에, 죽어버리고 싶다고 난리를 쳤던 적이 있다. 그땐 죽고 싶은 게 진심이라고 말해댔지만, 난 알고 있었다. 너무나 살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죽음을 생각할 만큼의 상황에 처해있는 그 상황이 달라지길 고대한다는 것은 결론은 살고 싶다는 것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조차 한동안은 살고 싶어 발버둥 치다가 막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죽고 싶다'는 비진의표시(법률용어:의사로서의 내심이 표현된 표시와 일치하지 않는 의사표시)이다.'살고 싶다'라는 것이 단순히 생명을 근근이 연장하는 것을 말하진 않는다. 자신에게 남은 나날이 단 며칠뿐이라 해도 살아있는 그 며칠까지 '잘' 있고 싶은 거다. 죽어보지 않고서야, 정말 저승이란 게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인간들은 이승과 저승 모도 만족스러운 날들이 이어지던 가운데, 이제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웰빙과 웰다잉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다.


- 흐르는 물이 되어 - 중에서

그것은 상쾌함을 넘어, 황홀할 지경이었다. 비유하자면, 평생 70퍼센트밖에 차지 않던 배터리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100퍼센트까지 완전 충전 상태가 된 듯한 기분.



 라디오에서 요즘 자주 들리는 광고가 있다. '너무 피곤해 ~너무 피곤해~ 너무 피곤해~'이 가사만 반복되는 자양강장제 음료 광고다. 너무 공감 가서 피식 웃게 된다. 요즘 아이 낳고 육아와 살림으로 피곤하다고 말하는 내게 남편이 말한다. '넌 그전부터 항상 피곤해했어. 언제 안 피곤한 날이 있었어?'ㅎㅎㅎ반박의 여지가 없다. 미스 때는 일 다닌다고, 결혼 후 임신 전에도 일 다닌다고, 임신과 출산 후에는 애 키우고 집안일한다고, 항상 이유는 얼마든지 있는 피곤함이다. 그런 와중에 완벽한 충전 상태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획기적인 정화수가 있다면 개인의 삶의 질의 향상을 넘어서 국가 차원에서도 혈안이 될 만하다.


 처음에는 나라면 사용법이 좀 복잡하고 위험요소가 많아서 쓰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 모두 정화수를 활용하면서부터 잠도 안 자고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면(그럼에도 잠을 많이 잔 사람보다도 더 상쾌한 컨디션이다.) 반드시 잠을 일정 시간 이상 자야 하고, 휴식도 해야 하고,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하느라 꽤 많은 시간과 정성을 소요하는 나는 뒤쳐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나도 결국 정화수를 활용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결국 개인의 욕심은 전체의 욕심이 되고, 언제나 그렇듯이 욕심이란 건 끝이 좋지 못하다.


 작가 스스로도 인간들이 얼마나 지질한(지질하다:보잘것없고 변변치 못하다.) 존재인지 다루고 싶었다고 했다.(2018.05.07 교보문고 북뉴스에 실린 인터뷰 중) 기묘하거나 기괴하기도 하고, 공상과학 또는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하기도 한 독특한 여러 이야기들의 거두절미한 박진감 있는 전개가 매력이다. 바로 다음 줄, 다음 장이 궁금해지고 무심결에 적극적으로 온갖 추측을 하며 빠르게 읽어나가게 된다. 형상화 능력이 약한 나 같은 사람도 김동식의 <회색 인간>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그림으로 잘 그려진다.  그러다가 어느덧 툭 떨구는 결말은 '아!' 하며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안쓰러운 존재들인지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뭐, 가끔 위대할 때도 있다. 마냥 사랑하기엔 좀 그런데 웃기고 짠해서 마음이 가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