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능성 우울증을 아시나요
이주 전이었던가. 남편이 퇴근 시간 즈음에 갑자기 전화가 왔다. 낮에 온 전화가 아니라 곧장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받았다.
"어후 눈이 엄청 와! 거기도 그래?"
나는 요즘 창문에 비가 부딪혀 소리가 나지 않는 한 날씨가 어떤지 잘 모른 채 살고 있다. 하지만 온종일 입을 꾹 닫고 있던 커튼을 열며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한다.
"여기는 그저 그래. 약간 왔어."
방에 있던 아이가 행여 눈치채고 나와서 호들갑을 떨까 봐 나는 빨리 커튼을 치고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며 대충 전화를 교묘하게 빨리 끊었다.
오늘도 눈을 뜨니 오후 2시 반. 처음에는 화들짝 놀라거나 일종의 자책감이 들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잠깐 환한 듯하다가 금세 빛바랜 색감을 띄고 곧 어둠에 빨려 들어가는 겨울 날씨가 지금의 내 모습과 닮았다. 한 시간 후 즈음이면 아이가 돌아올 테고 간식 챙겨주고 알림장을 확인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운동하고 나면 저녁 차릴 시간이다. 대충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 바쁘게 흘러간다. 빨래부터 돌린 뒤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식사를 만들기 전에 아이에게 공부거리를 주곤 하는데 전혀 멀티가 되지 않는 나에게 아이는 중간중간 뭘 묻는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저녁을 만들고 있는 나는 신경이 곤두서있다. 눈 뜬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으면서 온종일 노동에 시달린 듯 저녁식사를 만드는 동안 식은땀도 가끔 난다. 밤에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일을 하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짓만 하면서 결국 아침이 다되어 눈만 감고 있다가 겨우 아이 식사를 챙겨주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에 당연하다는 듯이 또 커튼을 치고 환한 대낮에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남편이 오면 다 같이 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종종 웃는다. 믿을 수 없게도 주중은 늘 집밥을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차린다. 주말도 한 끼 정도 외에는 거의 집밥이다. 물론 주말 저녁은 남편이 만드는 날도 자주 있다. 때론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내가 더 주절주절 떠들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떠드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내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다. 뉴스나 카더라 소식, SNS나 숏츠에서 알게 된 이야기, 친한 지인들 이야기들이다. 난 오래전부터 남편에게 내가 쓰는 글,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오늘 한 것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요즘은 플랫폼 초기모델 완성을 앞두고 회의처럼 나누는 이야기가 많다. 이 역시 놀랍게도 착착 진행 중이다. 어제 특허 건으로 변리사에게 최종 기획서를 제출했고 오늘 임시명세서를 받았고 착수를 하게 되면 송파구 소재의 특허법인에 내방해야 한다. 그날도 분명 놀랍게도 세상 멀쩡한 모습으로 나갈 것이다.
밥을 차리는 건 온갖 재료 손질부터 반찬 서너 가지에 밥과 국, 메인요리까지 다 따지면 1시간 넘게 걸리는데 먹는 건 허무하게도 15분 정도면 끝난다. 이제 또 설거지가 잔뜩이다. 남편은 하루의 노고를 보상받겠다는 강한 의지로 소파에 홀연일체가 되어 있다. 남편은 잘 모르지만 밤낮이 완전히 뒤바뀐 나는 낮에 충분히 잤기 때문에 그 모습에는 전혀 화가 나지 않는다. 이때 아이가 또 편해 보이는 아빠를 뒤로 하고 엄마엄마 하면서 나를 찾는다. 그러면 나는 이제 대답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왜!"
"뭐!"
다정하지 못할지언정 그저 평범한 '응'을 두고도 굳이 왜, 뭐,라고 대답한 것에 아차 싶었지만 점차 그냥 습관이 되었다. 낮에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다가 저녁 설거지를 할 즈음 거의 그로기에 가까운 내 정신은 이 고비만 넘어가서 밤에 혼자가 되면 완전 릴랙스 됨에도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결국 아이에게 날 선 반응을 해버리고 만다. 아이가 말을 잘 안 듣거나 장난을 하다 사고를 치거나 자주 설명해 준 것을 또 까먹었거나 문제집 풀어놓은 게 형편없을 때는 여지없이 폭발했다.
어느 날 문제집을 푸는 도중에 자꾸만 들락날락 거리는 아이에게 들어가서 집중하라고 화를 내는 나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그럼 화가 안 나? 몇 번을 다 끝내고 나오라고 말했는데 계속 저러잖아."
"너 요즘 그냥 애가 부르기만 해도 화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