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슬렌포니아를 찾아서
어쩔 수 없이 덜 친한 사람에게 더 친한 사람보다 예의를 차려야 할 때가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 여부가 다르기 때문이다. 너무 아파서 취소했던 절친과의 '난생처음 서울 파르나스 라운지 카페'일정보다 며칠 앞서 있었던 지인과의 선약은 컨디션이 견딜만한 수준이기도 해서 약을 챙겨 먹고 나갔다. 어쩌면 그놈의 예의를 차리는 바람에 정작 절친을 못 만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의 약속장소는 일생에 두 번째 와보는 낯선 장소, 대흥역이었다. 역 내에서 지인을 만나 함께 이동했는데 인근의 연남, 합정은 익숙한데도 여긴 또 달랐다.
도착한 식당은 복잡스러운 골목길 한편에 있었는데 가게 내부가 매우 협소했다. 맛집은 확실한 모양인지 자리는 거의 꽉 차 있었고 우리는 작은 주방 안이 훤히 보이는, 식자재 냉장고와 밥솥 앞에 있는 구석 자리에 겨우 자리 잡았다. 주문 후 선결제를 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휴대폰은 자리에 앉아 한두 마디 나누자마자 갑자기 둘 다 휴대폰에 '서비스 불가, 유심을 확인하세요'가 떴다. 서울 식당에서 이런 경우도 있냐며 '여기선 뭔 일 터지면 안 되겠네.'라고 실없는 소리를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인은 음식 맛에 감탄하며 또 오고 싶다고 했다. 사실 나는 컨디션 이슈로 먹는 행위 자체가 힘들어 겨우 먹었음에도 진심으로 뿌듯하고 좋았다. 난 가끔 내가 그래도 착한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한다.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가며 중간에 폰을 잠시 봤는데 이제 지인의 폰은 멀쩡한데 내 폰만 '서비스 불가. 유심을 확인하세요.'상태였다. 폰이 먹통이 되어버리니 낯설었고 약간의 불안도 느꼈다. 하지만 그 불안은 점차 사라지고 내가 나서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점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에 가는 것만큼은 도무지 방법이 없어 결국 지인이 역 근처 ATM에서 뽑아준 만원으로 집에 돌아왔다. 마지막에 마을버스를 탈 때는 현금 없는 버스여서 기사님이 마뜩지 않은 목소리로 '저기 청소도구통에 넣어주세요.'라고 해서 겨우 탔다. 현금아, 네가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니. 네가 최고인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 너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세상이 되었구나.
애초에 컨디션이 꽝이어서 읽을 책거리도 들고 나오지 않았던 터라 집에 가는 동안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게 당연한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이토록 어색한 세상이 되었다. 외출 후 연락을 하려면 공중전화를 쓰고 밖에서 시간을 때울 때는 상념 외에는 신문이나 종이책을 보던 시절.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휴대폰으로 인해 쉽게 만나고 쉽게 시간을 때우고 쉽게 바꾸고 파투내기도 하는 지금보다 그때는 누군가와의 만남이 더 애틋하고 소중했다. 집에 와서 남편이 단면이 날카로운 무엇으로 유심을 뺐다 다시 끼우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했다.
마냥 속 시원하기보다는 약간 아쉬웠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는 약속장소에서 위치를 확인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남겨진 연락을 보고 연락을 하며 삐삐처럼 사용하는 것 때문에 종종 핀잔을 들어왔다. 조금의 기다림과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 세상, 즉각적인 반응이 정답이 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말과 메시지에 바로 반응하지 않는 상대방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불만을 드러낸다. 폰이 먹통이 된 다섯 시간 동안 전혀 거리낄 것 없이 전적으로 대화 중에 상대방에게 집중하고 혼자 사색과 풍경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낯설지만, 원했던 시간이었다.
이 책은 우주 개척 시대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고유의 인간이기를 바라는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한국문학과학대상작 <관내분실>과 가작이자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포함한 일곱 가지의 이야기들은 단편들이지만 하나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처럼 꽉 찬 느낌을 준다.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단편소설집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다. 맡은 바를 확실하게 해내는 소수정예요원들처럼 각 이야기들은 확실한 하나의 변화를 담고 있다. 짙은 농도의 서사와 딱 좋은 타이밍에서 마무리되는 짧은 서사에서 독자들은 더 강력한 울림을 얻는다. 일곱 가지의 이야기들은 기술, 우주, 외계인, 데이터 등을 소재로 우리들이 어긋난 있고 상실된 상황에서 서로에게 어떻게 남게 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초고도화된 과학기술이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게 밀어붙인다 해도 그 관계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인지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p11.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p45. '이로써 나는 태어날 가치가 없었던 삶임을 증명하는가?'
p48. 어떤 존재에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p49.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p51. 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p52.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p54.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내가 만날 만한 사람들 중에서 내가 너를 가장 사랑해."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