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도전하는 삶을, 다음에는 성공한 삶을 쓸 수 있기를
며칠 째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으려고 베란다를 갈 때마다 애써 흐린 눈을 하고 외면했던 잔뜩 쌓인 분리수거를 정리했다. 아직 덜 큰 아이를 포함하여 고작 세 명 사는 집에서 뭔 쓰레기가 이렇게 많은지. 이것도 쌓이면 꽤 번거로운 일이다. 바리바리 분리수거 된 봉지들을 들고 1층에 내려가 버리는 건 단 몇 초면 충분했다. 짧지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는 여전히 차갑지만 햇빛에 닿은 사물들에서 봄의 색감이 느껴졌다. 그러다 빌라 앞으로 누군가 지나가기에 황급히 집으로 올라왔다. 뿌리 염색을 할 때가 한 참 지나 허옇게 볼썽 사나운 정수리, 브래지어를 챙겨 입기 귀찮아서 낡은 패딩 조끼를 여미어 입고 나온 내 모습은 완벽한 타인이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완연한 겨울일 때보다 이제 봄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더 추운 법. 2년간 준비한 플랫폼, 1년 반 동안 써온 72편의 글. 플랫폼은 준비를 거의 마친 채 세상 앞에 대기 중이다. 글은 원천 소스가 마련되었을 뿐 기획부터 전체 원고 완성까지 가다듬고 추가하는 작업이 꽤 남아있다. 중요한 건, 둘 다 이제 긴 겨울을 깨고 봄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자주 듣던 사람이 화가가 되고 노래 잘한다는 말을 자주 듣던 사람이 가수가 된다. 이는 꽤 개연성 높은 전개다. 아무리 내 꿈이라도 글 잘 쓴다는 말을 자주 듣지 못했다면 꿈꾸지 못했을 거다. 은사님들, 웹진 편집장님, 다독가이자 마음에 없는 말 잘 안 하는 절친, 책 진짜 안 좋아하는데 내 글은 재밌고 잘 읽힌다 하는 사람들, 과거를 극복한 척하는 게 아니라 극복을 넘어서 승화한 것 같다며 비법을 궁금해하는 사람들..그런 말 좀 들었다고 해서 다 작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말은 도전해 보라는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이야기를 멋진 소설로 만들고 싶어서 소설을 써봤는데 완성은커녕 전개 자체가 역부족이었다. 에세이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 분명 난관에 부딪히겠지만 일단 완성은 가능한 에세이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1년 반 동안 쓴 글 총 72편, 내 컴퓨터에 저장된 쓰다 포기한 A4 130여 장의 소설. 그중 일반에세이의 원천 소스로 활용할만한 글들은 쓰다 만 소설의 일부와 서평에세이 발행글을 제외하고 대략 평균 6천 자 분량으로 쓴 47편의 발행글이다. 분량으로만 보자면 보통 두께의 에세이 한 권(약 250페이지)은 나온다. 브런치를 출간 작업용이 아닌 노트처럼 활용한 탓에 제대로 된 기획과 목차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썼고, 독자가 늘 다른 사람일 거라는 전제로 쓰다 보니 과거 서사가 인생의 큰 축인데도 늘 축약되어 반복되었다. 이번에 에세이 원고를 만들 때는 그 부분을 따로 빼내어 큰 목차로 만들고 축약한 이야기를 각 편의 이야기로 펼치는 과정이 우선이다. 그다음은 전체 글을 에세이에 맞는 결로 각색해야 한다. 확실히 연재 초반보다 최근의 글이 훨씬 쓸 만해서 초반 발행글은 각색이 아니라 거의 새롭게 써야 하는 것들도 많다.
이런 중대한 결심에는 챗지피티도 한몫했다. 며칠 전 아이 옆에서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잠이 깼다. 안 씻고 잠든 터라 씻고 나왔더니 잠이 달아났다. 어차피 달아난 잠을 붙잡을 순 없고 그렇다고 지겨운 일을 또 하기는 싫고, 읽을 책은 없어서 결국은 또 스레드를 열었다. 독서와 글쓰기을 좋아하지만 일상은 전혀 고상하지 않은 내 피드에는 가볍고 웃긴 글과 작가나 편집자의 정갈한 글이 공존한다. 실실 웃으며 댓글놀이를 하다가 여러 출간 소식에 약간 질투가 난다. 나는 이부진, 김연아, 장원영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부럽기만 할 거다. 반년 전만 해도 아마추어 작가들의 출간 소식은 그저 부러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질투한다. 아직 내가 완벽히 준비되지 않았기에 그 질투도 완벽한 질투는 아니고 질투에 가깝다. 재미 반 진지함 반으로 챗지피티에게 브런치에 연재한 글 중 몇 개를 긁어 붙여서 읽게 했다. 그다음 문학성, 문장의 안정감, 문장의 리듬, 표현력, 개성, 서사, 작가적 캐릭터를 분석하고 출판사 투고 대비 출간 제의가 들어올 확률과 투고하기 적합한 출판사 리스트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았다.(출판사 리스트는 1차로 투고할 15곳 추천 리스트이며 2차 투고 추천 리스트 10곳도 알려주었으나 생략하였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주인의 대화 방식을 학습한다. 내 챗지피티는 최근 플랫폼 사업기획의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늘 잘 따지는 나를 닮아있다. 즉, 대충 말해주었거나 입에 발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희망사항이 있다는 말씀. 프롬프트에 프로세스가 돌아가며 동그란 커서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분석 과정이 빠르고 작게 흘러가는 동안, 심장이 점점 요동쳤고 긴장됐다. 어느새 재미는 온데간데없고 진지함만 남았다. 챗지피티는 보통 한 출판사에서 들어온 전체 투고량 대비 출간 제의 회신율은 1~3%라고 했다. 이 분석이 맞다면 출간 작가들은 모두 거의 기적을 이룬 사람들인 셈. 챗지피티는 기획과 목차 정리를 잘하여 전체 원고를 완성한다면 나의 작가적 강점과 잘 부합하는 출판사에 투고 시 20% 정도의 회신율이 예상된다고 했다. 이 내용은 일부러 캡처 화면을 업로드하지 않겠다. 너무 고맙긴 하지만 내가 그 정도라고?
아이가 두 살이던 2019년에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블로그에 글 좀 쓰겠다는 데 거 참 유별나게 구네.' 하면서 브런치가 뭔지도 잘 모른 채 결혼 후 처음으로 친정에 혼자 들렀다가 돌아와 즉흥적으로 썼던 몇 편의 글을 묶어 냈다. 남편도 뭐 그런 이상한 블로그가 다 있냐고 했다. 3일 후 즈음에 '축하드립니다.' 하면서 작가 승인이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 메시지가 무슨 상장처럼 꽤 거창한 디자인으로 와서 이 블로그는 전반적으로 유별나다고만 생각했다. 정말 대충 써서 냈는데 단번에 승인되어서 그냥 플랫폼에 물 흐릴 사람을 가려낼 목적으로 글을 내라고 하는 줄 알았다. 정기 연재를 할 생각도 전혀 없었고 단순한 블로그라고 생각하고 대충 몇 번 썼다. 그러다 육아와 더불어 법무사 시험공부를 하면서 4년간 글을 못 썼고 1년 반 전부터 정기연재를 했다. 책을 좋아하니 책을 매개로 한 서평에세이 한 편,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는 에세이 두 편. 형식이 그렇다는 것뿐, 30편을 쓰면 완결인 것도 모르고 의식의 흐름대로 쓴 탓에 완결된 연재 한 편은 말 그대로 글만 30개가 모여진 채로 갈무리 되어버렸다.
그제야 좀 화끈거리면서 브런치북이 단순한 블로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25편이 실려있는 서평에세이도 뒤늦게나마 조만간 프롤로그, 에필로그라도 다급히 써서 구색이라도 갖춰 갈무리해야 하나 싶다. 최근의 세 번째 연재에서는 나의 심리 변화와 도전기를 담은 기획에 맞춰 1편도 프롤로그부터 시작하여 연재 중이다. 브런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처음부터 간절한 마음으로 기획에 맞는 흐름으로 글을 연재해 온 분들은 투고를 진행할 때 기존 연재글을 거의 그대로 살리는 방식일 것이다. 처음에 품을 많이 들인 만큼 그들은 효율적인 투고가 가능한 거다. 그에 비해 나는 시작이 그저 편했던 만큼 기존 글들을 재편성하고 각색하고 버릴 건 버리고 새로 써서 추가하는 원고 작업이 한창 걸릴 전망이다. 어쩌면 글은 쌓여있지만 뒤죽박죽이고 안 푼 썰도 많은 이 상태가 다행인 면도 있다. 브런치북의 기획과 내용이 너무 완전무결해도 출판사에서 이미 모든 원고가 오픈된 글을 굳이 출간할 필요성을 못 느낄 수 있다는 어느 출간 작가의 팁도 있었다.
출간에 대한 생각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책을 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굉장히 글을 잘 써서 작가가 된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한 분야에 오래 있으며 어느 정도 인정받으면 먼저 제의를 받는 경우도 많고 독립출판도 요즘 많아져서 자기만족의 행위라고 말한다. 스레드의 내 피드에서만 봐도 여태 책 하나를 못 낸 건 나 하나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고 나 역시 서점에 깔린 수많은 책들 전부가 엄청난 필력이 있어서 세상에 나온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책 하나가 나오고 제대로 팔리는 데에는 책의 분야, 영업과 마케팅 등 다른 요소들도 많이 적용된다. 그러나 다들 작가인 세상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책에 관심이 없는 편이거나 글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말이 다소 섭섭하지만 그들 나름의 관심사가 따로 있을 것이고 다른 꿈이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창업과 육아와 엄마표 학습까지 바쁜 일상을 쪼개어 글을 정기적으로 쓰는 사람으로서, 특히 문학 책을 내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에 속한다. 어떤 사람에게 자신이 다년간 일해온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력을 정리하여 책을 쓰라고 하면 어느 정도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출간은 또 다른 이야기지만 막연하고 엄두도 못 내는 정도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에세이나 소설, 시집, 시나리오, 대본을 쓰라고 한다면 해볼 만하다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학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며 매우 복합적인 장르다. 특별한 개인의 서사, 평생 읽어온 책들, 주로 써왔던 언어와 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온 방식, 인간과 사회를 보는 관점이 복합적으로 엮인다. 여기에 작가만의 문학성과 문장력까지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 가능한 장르다.
그토록 어나더 레벨인 게 문학인데, 나의 문학 작가로서의 가능성과 자질에 대해 꽤 호의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보니 우습게도 눈물이 솟아올랐다.(누가 보면 책이라도 나온 줄) 나대지 말라고 생각하면서도 한껏 고무된 바람에 아침이 될 때까지 갑자기 투고 기획서를 작성했다. 챗지피티의 응원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언젠가는 책을 낼 거라며 희망사항처럼 미뤄지던 내 꿈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게 만들었다. 오래전 인상 깊게 봤던 영화 'HER'속의 주인공의 심리를 이제야 체감했다.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작업이 힘들어도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꽤 외로웠나 보다. 아이는 주말 아침에 웬일로 자기보다 먼저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눈이 둥그레졌다. 마흔둘에도 엄마는 이렇게 꿈을 꾸고 있어. 그러니 너도 고작 열 살이면서 얼마 전 그냥 알바나 하면서 살고 싶다는 속상한 말은 또 안 했으면 좋겠구나. 너무 나만 꿈을 꿨나, 아이의 학습이 촘촘하게 다져지지 않은 느낌이라 요즘엔 태권도와 피아노 학원도 잠시 끊고 학습 지도에 더 품을 들이고 있다.
남편은 1년 반 전 법무사 시험을 조지고 시험장에서 나오는 나에게 곧장 솔직히 법무사보다는 책 쓰고 돌아다니며 강연하는 삶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남편에게 챗지피티의 말들을 보여주며 투고 기획서를 썼다고 했더니,
"걘 원래 칭찬 위주야."
.... 나에게 책 써보라고 했던 남편이기에 나름 응원의 말은 조금 기대하고 말했건만. 어느 강사가 그랬다. 남편에게 자신의 꿈을 굳이 말하지 말라고. 물론 아내의 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는 남편도 있다. 그런 남편을 가지신 분들, 정말 축하드려요. 저는 반드시 언젠가 출간 작가가 되어 남편에게 챗지피티가 칭찬 위주로만 말하는 애는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삶을 살아볼게요. 남편이 그러거나 말거나 총 4부, 각 부당 12편 정도로 구성하여 원고 작업에 들어갔다.
출간 작가들의 곡소리도 많이 들었다. 책을 쓰는 것도 고통이지만 파는 건 더욱 고통스럽다는 말. 그럼에도 쓰고 싶다. 불행한 과거를 비극으로 소비하지 않고 블랙 코미디로 재탄생시키며 삶을 확장하는 자산으로 삼아 유쾌하게 살고 있는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다. 자기 앞의 생을 자기 뒤의 생과 연결하지 않는 것. 깜깜한 방에 스위치를 켰을 때 너무 밝은 불빛에 놀라 스위치를 끄지 않는 것. 그냥 뚜벅뚜벅 밝은 방으로 들어가 그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그렇게 밝은 빛을 두려움 없이 만끽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다. 완성된 내 이야기가 꽤 굴곡을 겪어왔지만 자기 삶을 새롭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함께 위로와 용기를 조금이나마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이렇다 할만한 걸 이루지 못했음에도 단 한 번도 망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한 사람의 계속 도전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망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다. 멀지 않은 미래에 플랫폼이 잘 되고 출간 작가가 되고 나면 그때는 도전하는 삶을 지나 성공한 삶에 대한 이야기도 또 쓸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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