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_발랄한 흙수저
앞으로의 연재는 기존 연재글을 에세이 원고로 각색한 것을 올릴 예정입니다.
기존 연재글 중 '더 비기닝 : 단순하고 발랄하게'를 각색한 내용입니다.
같은 이야기 또 하네 하면서 화내지 않기^^
웃고 사는 건 그럭저럭 할 만 했다. 문제는 버리는 데 돈이 드는 장롱이었다. 너는 고민이 없겠다, 할 말 다 하고 살아서 좋겠다? 겠냐고. 엄마 집에 있는, 포도나무 위의 두 마리 새가 양각 문양으로 있는 촌스러운 목재 장롱을 보는 건 늘 울적하다. 엄마도 같은 생각인지, 최근 몇 년에 걸쳐 없는 돈을 털어가며 가구를 하나씩 바꾸고 있다.
“할머니, 엄마 어릴 때 사진 있어요?”
엄마는 손녀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장롱 속에서 앨범을 꺼냈다. 두꺼운 장롱 문이 둔탁하게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순간, 곤죽이 된 나를 보며 개 같은 년, 뭔 년 하면서 장롱문을 훽 열어 점퍼를 걸치고 집 밖을 나가던 그 놈이 떠올랐다. 확실히 평소에는 거의 생각하지도 않는 과거가 엄마 집에 오면 강제 소환된다. 그럴 때면 잠깐 눈을 감고 살짝 고개를 흔들며 다시 뜬다.
사연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가족 사진이 없는 편이라 앨범에는 엄마와 이모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 더 많다. 딸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이모 할머니의 웃긴 사진들에 깔깔거렸다. 아가씨인지 총각인지 당최 모르겠는 이모의 젊은 시절은 다시 봐도 웃기다.
분명 젊은 시절의 이모들,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는 단연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이모의 증언에 따르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어 공부를 중학교까지 밖에 못했는데도 오로지 미모 하나로 유수의 청년 몇몇이 프로포즈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모의 얼굴이 훨씬 좋아 보인다. 이모는 칠십 중반이 넘은 지금까지 가정에 충실하고 돈도 잘 버시는 이모부와 비교적 편하게 살았다. 이모의 얼굴은 몇년 전부터 부쩍 풍요로움과 여유가 깃들어 은은한 빛이 난다. 이제 엄마를 언니로 보는 사람도 있더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별 대꾸를 하지 못한다. 그러게, 말 좀 듣지 그랬어. 부모는 물론, 7남매 형제자매, 친구들 전부가 다 말리는 결혼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여러분도 메모하세요. 단순히 부모 욕심인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는 좀 들어요. 제발요. 그냥 당신은 자기 삶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인 거라구요.
“와….노송 가구? 요즘 보기 쉽지 않은데.”
얼마 전 수납장을 설치하러 온 기사님은 장롱을 유물 보듯 했단다. 장롱을 사던 순간은 어린 마음에 어쩌면 나도 이제 평범하게 살 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가진 것 같다. 씻을 때 물을 끓여 쓰던 서울 단칸방에서 경기도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 갈 때 샀던 장롱을 31년째 볼 줄이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새로 사라고 돈을 쥐어 주고 싶지만 결혼 후에도 계속 이런 일 저런 일이 많이 터져서 그럴 여유가 없어 무심한 척했다.
엄마와 나, 9살 딸아이는 별로 있지도 않은 사진들을 침대 위에 펼쳐놓고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 번도 따져본 적이 없었는데 백일 사진, 돌 사진조차 없었다. 딸아이는 ‘우와, 이건 그냥 완전 나 잖아?’ 하면서 나의 다섯 살 즈음의 사진을 보며 신기해했다. 몇 장 없는 사진이지만 나는 참 변화무쌍했다. 완전 아기 때에는 못 생겼다가 4살부터 갑자기 오목조목한 얼굴로 바뀌었다. 1학년 때는 반에서 가장 작았고 생리가 5학년 시작 전 봄방학에 빠르게 시작되면서 키가 더디게 크다가 초등학교 졸업 즈음에 그대로 멈췄다. 그래도 초등학교 졸업까지는 키가 큰 축에 들어가서 제법 늘씬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계속 키가 크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점점 밀려 키는 평균보다 작은 편으로 멈췄다. 골고루 잘 먹고 스트레스 안 받고 잠을 잘 자야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적당한 나이에 생리를 한다고 한다. 더 작았을 뻔했는데, 이만하길 다행이다.
그런데 중간 중간 엄마와 나의 모습만 이모티콘처럼 작게 오려진 사진들이 있었다.
“엄마, 이거 왜 이렇게 잘랐어? 배경까지 다 없어졌네.”
“몰라. 그냥 배경이고 뭐고 다 싫어서 잘랐어.”
우리 모녀는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딸 아이도 덩달아 웃었다. 혼자 이 작은 집 구석에 앉아 앨범을 꺼내 굳이 정성스럽게 가위질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상처를 잊자는 생각보다 잊을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게 더 나을 때가 많다.
몇 년 전 사촌 언니 가게 근처에서 딸 아이와 밥을 먹었다. 언니는 내가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친척들은 나의 독신주의에 대해 염려는 하면서도 반론을 적극적으로 펼치진 않았다. 누가 봐도 납득이 되겠지. 언니는 내가 두 살 즈음에 우리집에 놀러 왔다가 그 놈이 나를 벽에 던지는 걸 보고 식겁했다고 말했다.
“와, 진짜? 나는 진짜 살 팔자가 맞나 보다. 나 아이큐도 128이라 높은 편인데. 너무 신기한데?”
아무리 그래도 두 살에? 그것도 벽에? 약간 놀랐지만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감정은 뒤로 하고 어떻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게 몸에 밴 탓인지, 아니면 정말 놀랍지 않은 건지, 때로는 모호하다.
“음, 여긴 꽤 불리한 조건이군요.”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 지옥은 단칸방에서 신축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장롱을 사던 순간과 그 이후 단 몇 달, 잠깐 웃었다가 다시 웃을 수 없었다. 장롱과 좌식 화장대만 있고 침대가 없는, 가운데 공간이 넓으면서도 가장 안 쪽에 위치한 안방에서 맞는 날이 가장 많았다. 이 장롱은 그냥 장롱이 아니다. 지옥의 목격자다.
또 시작이다 할 때마다 절대 얼굴은 다치지 않으려고 복싱 선수처럼 가드를 올리고 최대한 몸을 말고 버텼다. 때로는 멍들고 피가 나고 문드러졌던 상처들이 지워지지 않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회복되는 몸을 보면 가끔 억울했다. 그러던 고2 어느 날, 가드를 잘 올렸 어야 했는데! 방심한 사이 거구의 발길질이 턱에 명중했다. 며칠간 음식 먹을 때마다 턱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턱관절이 이탈했다고 했다. 인공 관절 삽입은 위험 부담이 크고 사는 데 크게 불편한 건 아니라면서 관절 보조 치료용 교정기를 추천했다. 맞아요. 사는데 가장 불편한 건 턱관절뼈 하나쯤 없는 게 아니라 그 놈이죠.
엄마는 울면서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싼 교정기를 맞춰주었다. 처음엔 아프더니 점차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교정기를 안 하고도 살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남들과 식사를 할 때면 관절이 있는 다른 쪽으로만 먹으려 애쓸 뿐이다. 그러다 지치면 어쩔 수 없이 반대쪽으로 씹게 되는데 그럴 때면 턱에서 나는 소리가 신경 쓰여서 남의 집에 가서 밥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사라지지 않는 증거가 몸에 남았다. 모든 일은 증거가 남는다. 방심은 금물. 똑바로 살아야지.
악당을 계속 마주치고 계속 죽어도 다시 멀쩡히 웃는 얼굴로 되살아나는 게임 속 캐릭터를 보면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허벅지가 터져서 자리에 앉기 힘들고 입가가 터져서 밥 먹기 힘들어도 있는 반찬을 다 꺼내어 밥을 챙겨 먹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먹었다. 그래야 살지, 하면서 계속 먹다 보니 뭔 지랄이 나도 진짜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보통이 아닌 삶이 시작되었다면 더 단순하고 발랄하게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그 길만 주시하고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애썼다고 해서 동화처럼 갑자기 확 모든 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래도 꾸준한 태도를 유지하면 결국은 승리한다.
얼마 전 SNS에서 태어날 때 한가지만 받을 수 있다면 부모 복, 배우자복, 자식 복, 형제복, 친구 복 중에 무엇을 고를 것이냐는 앙케이트가 올라왔다. 나를 포함한 1천개가 넘는 댓글들의 절대 다수가 부모복을 골랐다. 부모복이 있다면 그 이하의 복은 다 딸려온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주장이었다. 복은 바라지도 않으니 내버려뒀으면 좋았을 걸. 쓰레기봉지 안에 멀쩡한 물건을 버린 후 시간이 한참 지나면 그 물건도 결국 쓰레기가 된다. 그 놈 같은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쉽지 않았다.
작년 추석에 엄마와 우리 세 가족 모두, 엄마 집 근처 한강 숲길을 걸었다. 엄마 집에서 한강 산책로까지는 걸어서 20여분 거리. 나라면 신나서 자주 걸을 텐데, 엄마는 어째 이 곳에 산 지 12년이 된 지금까지도 거의 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엄마가 노쇠해서 그런 게 아니다. 엄마는 나보다 젊던 시절에도 늘 기력이 없었다. 가끔은 그런 본인의 모습이 멋쩍을 때마다 엄마가 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할머니가 나를 42살 때 낳아서 그런지, 영 기운이 없어. 진짜로.”
응 그래. 오래 전에는 엄마가 그렇게 말할 때면 핀잔을 주었지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무조건 본인이 정한 경계 안에서만 움직이는 엄마와 갑자기 막 튀어나가고 들이받기도 하는 나는 늘 불편한 부분이 존재한다.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나 달라서 엄마에 대한 애증이 컸던 시절도 길었다. 이제는 그래도 나를 두고 혼자 떠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 뿐이다. 오래도록 사진 찍는 걸 싫어하던 엄마가 그 날은 웬일인지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 중 몇 장을 골라 스레드에 올려서 간단하게 엄마와 내가 이런 일을 겪었고 엄마가 고생하고 살아서인지 훅 늙은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는 글을 올리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글에 수백개의 좋아요와 댓글들이 달렸다. 그동안 스레드에 올린 글 중에 가장 열띤 반응이었다. 아이고 너무 못된 아빠네요, 어머니가 그래도 너무 곱고 정말 미인이시네요, 사진만 보면 그런 사연이 있는 모녀일 거라고 예상되지 않네요, 토닥토닥 해드리고 싶어요, 이제 행복한 꽃길만 걸으세요…등 응원과 격려의 글들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전부 댓글을 짧게 달았다. 그러다 잉? 스러운 글 하나를 발견했다.
‘이 세상 아빠들, 참 억울타. 돈 벌어주고, 키워줬더니 좀 혼냈다고 이러네. 그래도 아빠잖아. 아빠들 파이팅!’
할배요, 일단 돈도 안 벌어다 줬어요. 이걸 박제해 말어, 더 제대로 썰을 풀어 말어, 고민하다가 관뒀다.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아무리 많은 증거를 보여줘도 멍청이는 설득할 수 없다고. 어디에나 이상한 사람은 꼭 있는 법. 굳이 긴 말 안 섞고 안 엮이는 게 현명하다.
“너 까짓 게, 뭘 할 수 있겠어.”
늘 당신이 나에게 하던 이 말을 이제 돌려주겠다. 너 까짓 게, 뭘 할 수 있겠어. 이렇게 욕하고 싶어서 작가가 된 거냐고? 응. 고마워. 당신이 만든 나의 지옥은 오히려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어.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이 두렵지 않아. 내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좀 성가시기야 하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당신의 모습은 보나마나 초라하고 험상 궂은 노인이겠지. 난 보란 듯이 잘 살고 있어. 당신의 오랜 가스라이팅은 실패 했어.
지옥에서 생존하신 여러분, 당부의 말씀 한마디 드리겠습니다. 설마, ‘그래도 부모인데.’ 그런 개똥 같은 말에 갑자기 센치해지는 거 아니죠? ‘얼죽아’를 꼭 기억하세요. ‘얼어 죽어도 아버지 병수발은 안 해요!’, 어머니 버전도 내용은 좀 달라도 약자는 같습니다. ‘얼어 죽어도 아무리 엄마여도 병수발 안 해요!’ 명심하세요.
이제 당신들이 맘껏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씩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구석에 박혀 있는 꼬마를 본다면, 이제 어색하게 서 있지 말고 다가가 그 아이를 안아주세요. 그 동안 너무 애썼고, 그럼에도 잘 성장해서 기특하다고 칭찬도 해주시고요. 부디 이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은, 평안에 이르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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