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들 말하지만
내가 한 결혼 얘기를 하려고 했다. 내가 선택한 가족의 이야기.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태어난 가족의 이야기도 해야, 내가 선택한 가족의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20년의 외국 생활 후 한국에 도착한 지 이제 반년이 넘어가는데 부산에 있는 엄마아빠를 몇 번 못 봤다. 엄마아빠가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이혼한 우리 집은 약간 콩가루 집안 스타일인데 (근데 콩가루는 고단백에 저탄수화물식이라 좋은 거 아닌가요?), 엄마는 좋게 말하면 배려가 넘치고 다르게 말하면 걱정과 불안이 넘쳐서 뭘 스스로 하자고 하는 경우가 없는 사람이라 만나러 갈 계기가 없었고, 아빠랑은 한국에 온 후 좀 싸워서 한동안 얘기를 안 했다.
멀리 살 때는 관계 속의 어떤 부분은 아빠도 나도, 서로 멀리 사는 애틋함으로 넘어갔던 것 같은데, 한국에 와서 아빠와의 관계가 힘들어졌다. 가까이 살게 되어서 우리 둘 다 기대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게 안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기로 정했을 때 ‘일 때려치우고 나이 든 부모님 등골 빼먹으러 간다’라는 이야기를 농담 삼아 주변 사람들에게 했는데, 오랫동안 같이 룸메이트를 했던 사라가 진지하게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돼. 도움 받을 수 있을 때는 도움을 받아. 나도 휴스턴(사라네 엄마 아빠가 계신 곳)으로 애 낳고 돌아왔을 때. 엄마아빠한테 이것저것 도움 많이 받았어.”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다. 나는 큰 덩치에 늘 웃는 얼굴이어서 자이언트 곰인형처럼 보이는 사라네 아빠와 특히 마음이 잘 맞았다. 사라와 룸메이트로 지내던 한 해, 휴스턴에 있는 자기 집으로 사라가 나를 초대해 주었다. 도착하니 전에도 몇 번 만난 적 있는 빌이 우리를 맞아 주었고, 한 차례 반가움의 포옹 후 사라네 거실 소파 위에 푹 파묻혀 쉬고 있으니 빌이 물었다.
“끼리야! 요즘 어떻게 지냈니?”
“잘 지내죠! 어때요, 빌은?”
그러자 빌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다시 물었다.
“아니, 내 말은, ‘진짜로’ 어떻게 지내? 얘기 좀 해봐. (No, I mean, how are you REALLY doing? Tell me.)”
그래서 우리는, 정말 진짜로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찾는데 잘 찾아지지 않는 이야기, 우리 집의 엄마 아빠의 사이가 날로 악화되어 가는 이야기, 그리고 우울증으로 받기 시작한 심리상담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빌은 그 이야기들을 모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내가 잘 침실로 안내해 주었는데, 사라도 나도 도착하고 2박 3일 정도는 아기처럼, 하루에 열몇시간 정도는 잠을 잔 것 같다. 부스스한 얼굴로 “우리 너무 많이 자는 거 아니야?’”라고 서로 하는 이야기를 들은 빌은 좀 기뻐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그거 아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걸 거야. 너희가 자립해서 혼자 사는 게,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거든. 여기에는 누군가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이 드니까, 마음이 놓여서 많이 자는 걸 거야.”
그때 빌에게 받았던 따뜻한 사랑 같았던 그 무언가를 이번에 한국에 다시 오면 엄마아빠에게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는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왔고, 나의 기대는, 적어도 아빠에 한해서는, 와르르 무너졌다.
벚꽃과 진달래가 피어나는 3월의 봄에, 엄마 집에 짐을 풀고 아빠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아빠가 등산을 하러 가자고 해서, 나는 당연히 오랜만에 보는 아빠와 둘이서만 등산하겠거니 했는데 가 보니 아빠 친구가 하나 온단다.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아빠 친구를 픽업하러 갔다. 아빠 친구를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아빠는 기혼자에 딸도 있는 그 친구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불륜을 한다는 사실을 그 딸과 아내에게 기를 쓰고 숨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낄낄거리면서. 그러면서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집 부부가 남편의 불륜 문제로 싸웠고, 아내가 집을 나가겠다고 했는데, 그 집 아들이 밥상을 엎었고, “엄마 집 나갈 거면 이제부터 내 얼굴 볼 생각 하지도 마소!”하고 일갈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해 놓고 “아들이 있어야 돼”라고 말하는 아빠 옆에서 나는 눈앞이 분노로 어지러워졌다.
나는 부모가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아이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을 때가 많아 가슴 아픈 짝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를 미워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 아빠는 엄마가 어릴 때 나를 혼내라고 하면, 안방의 문을 잠그고, “나가면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해라“하고 속삭이면서, 짝, 짝, 짝, 하고 마치 나를 때리는 것처럼 커다란 박수소리를 내주던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성인이 되어 엄마가 나에게 자신의 감정적 버팀목이 되어 주기를 요구할 때 특유의 무던함과 무심함으로 나에게 숨 쉴 구멍이 되어 주던 사람이었다.
아빠는 딸을 미국에 있는 비싼 학교들에 보내주었다. 그 큰 투자에 본전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안 가고, 내가 뭘 할지 몰라 막막했던 때, 같이 시내에 나가 아빠 찬스로 책을 엄청 샀는데, 그중에는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이 있었다. 아빠에게 “나 언어학 할까? 근데 굶어 죽겠지?” 하고 얘기하니 아빠는 웃기는 소리 한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요즘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이 어딨노. 니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 하고.
같이 하는 저녁자리에서 아빠의 사업 파트너가 “사장님은 아들이 없어서 사업 물려줄 사람이 없어서 어떡합니까?” 했을 때 아빠는 “우리 딸이 똑똑합니다” 하고 답했다. 결혼하기 전, 잠시 한국을 방문한 어떤 날 아빠는 차 안에서, 자기 친구 하나가 “딸내미가 외국인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우짜노?” 하는 이야기에 “지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랑 하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꼬 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큰 돈 내서 멀리 보내줘 놓고는, 가끔 만나서 헤어질 때 울었다. 일본에 살 때 주말 동안 놀러온 아빠가 헤어질 때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 “내가 남은 인생동안 니를 몇 번이나 더 보겠노” 하고 쓸쓸하게 말해서 둘 다 차 안에서 눈물바다가 됐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빠는 등산 가는 차 안에서 나에게 한 그 끔찍한 이야기를 한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