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정해놓고 첫 직장을 나온 건 아니었다. 이직을 미리 준비하고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하루빨리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5개월 동안 월급 쓸 시간도 없었기에 이 정도 돈이면 다시 취업할 때까지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겠다는, 믿을 구석이 있어 다행이었다.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진 않았다. 우선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나를 위해 내가 주는 선물이었다. 열흘 정도 신나게 놀고 돌아오니 눈앞에 놓인 현실이 보였다. 지금까지는 항상 어디에든 소속이 돼있었다. OO중고등학교, OO대학교, OO주식회사. 이제는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취업준비생, 구직자였고, 실상은 백수였다. 뉴스에서 뻔질나게 들었던 말인데도 막상 내가 그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채용사이트를 둘러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혹했을 채용공고도 첫 직장처럼 근무 환경이 좋지 않은 곳이면 선뜻 내키지 않았다. 나를 지키고 싶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퇴사한 건데 다시 비슷한 회사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더 신중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게다가 공채 시즌이 지난 애매모호한 시기라 괜찮은 대기업 중에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전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공기업 채용공고가 보이기 시작했다.(정확히는 공기업, 공단, 재단 등을 포함해 공공기관이라 부르는 게 맞지만, 내겐 공기업이란 단어가 더 친근하니 공기업으로 통일한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다양한 공기업이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공기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진정한 신의 직장은 대기업이 아니라 공기업이었다. 매출의 압박이 없고, 급여나 복지가 나쁘지 않고, 소위 말하는 워라밸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짧은 인턴 생활을 경험했던 경제5단체와 업무 방식, 조직 분위기가 비슷하다는데 마음이 동했다.
공기업을 1순위로 취업을 준비했다. 처음엔 금방 다시 취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처음 지원했던 곳에서 서류와 필기를 통과하고 단박에 면접까지 갔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방에 공기업에 입성할 수도 있겠다는, 낙관적인 생각마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요행은 딱 거기까지였다. 면접에서 떨어졌고, 그 뒤로도 줄줄이 낙방이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다.
관심이 가는 몇몇 공기업의 이전 모집공고들을 확인했다. NCS(국가직무능력표준) 도입 전이라 공기업마다 필기 전형이 천차만별이었다. 서류 통과 후 면접 전에 행정학, 경영학, 경제학, 법학 등 여러 과목 중 하나를 선택해 전공 시험을 보고, 논술이나 다른 시험이 추가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전공 시험은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행정학을 선택해 이론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논술을 대비해 매일같이 주요 칼럼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했다. 가산점을 받기 위해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도 취득했다. 그나마 토익과 다른 자격증의 유효기간이 남아 있어 첫 취업 준비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합격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7개월간 서른 곳 넘게 지원했다. 간간이 시험도 보고 면접도 보러 갔지만, 몇 번이나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모든 게 희망고문처럼 느껴졌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나, 여러 고민이 들었다. 그때 한 공기업에 합격 메일이 날아들었다. 오랜만에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구직 활동과도 드디어 안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