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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진몽 Jan 12. 2020

1. 내가 대기업을 퇴사한 이유

대기업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처음부터 공기업을 신의 직장이라 생각하고, 공기업을 목표로 취업을 준비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쌓아온 경험과 스펙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회사,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고 어디든 괜찮았다. 몇 년에 걸쳐 토익, 토스, 제2외국어, 컴활, 워드, 모스, 한자, 경제·경영·무역 관련 자격증, 인턴, 봉사활동...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남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건 다 하려고 노력했다.(토익을 볼 때마다 포인트가 적립됐다면 VIP가 되지 않았을까.) 자기소개서를 쓸 때면 구애하는 한 마리의 수컷 공작새처럼 이렇게 준비한 모든 것들을 화려하게 펼쳐 보였다. 그럼에도 서류·필기·면접 전형을 수차례 낙방한 후에야 오매불망 기다렸던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내 첫 직장은 공기업이 아닌 우리나라 주요 그룹사 중 하나였다. 대기업치고 그리 큰 규모의 회사는 아니지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곳이었고, 연봉과 복지가 (최고는 아니어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합격 소식에 부모님은 너무나 좋아하셨고, 나 역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더 이상 취업을 위해 이 회사 저 회사 채용 홈페이지를 기웃거리거나 어색한 정장을 입고 덜덜 떨며 면접을 보러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 달간의 그룹 연수와 2주간의 자사 연수를 마치고 부서에 배치된 첫날, 야근이 시작됐다. 사수는 본인이 하는 걸 보고 배우라고 했다. 이 말인즉슨 사수가 야근하면 나는 자동으로 야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만 야근하는 건 아니었다. 오후 6시가 돼도 우리 부서가 있던 층에서 퇴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삼삼오오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맛없는) 저녁을 먹고 올라와서 업무를 이어갔다. 부서 배치를 받은 지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일찍 퇴근할 때까지 매일 밤 10시, 11시가 넘도록 일했다.(물론 이날도 엄청 이른 건 아니었다. 오후 8시 조금 전이었나. 이 시간에 퇴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같은 부서 동기와 퇴근길에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과 끊임없는 야근은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적응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갑질'이었다. 업종 특성상 낮과 밤,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없었고, 분 단위, 시간 단위로 매출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니 이에 대한 압박이 쏟아졌다. 목표로 설정된 매출을 달성하지 못하면 죄인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갑을관계에 대한 인식이 (그나마) 개선됐지만, 이때만 해도 매출 달성을 위해서라면 업무 현장에서 갑질이 만연했다. 시간, 장소에 관계없이 협력업체를 오라 가라 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협력업체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고성을 지르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묘사할 순 없지만,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매출이 대체 뭐길래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대해야 하는 걸까, 이성적으로 이야기해도 될 일을 굳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더 끔찍한 건 이 회사를 계속 다니면 몇 년 후에 나도 이런 사람이 돼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힘겹게 들어온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 부조리를 두고 보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신입사원 몇 개월 차였던 그 당시의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 조직문화가 바뀔 것 같지도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계속 가면서 고통받느니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으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백수, 무직자가 됐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다시 취업 시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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