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당신의 그늘 #4
"답답해."
버릇처럼 뱉던 말이었다. 잘못된 것도, 잘못한 것도 없는 평탄하고 고요한 삶이 꼭 그랬다. 개인 브랜드를 한창 운영할 즈음, 나는 비치는 내 모습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었다. 누구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짠할 정도로.
그렇다고 남의 거죽을 뒤집어썼던 건 아니다. 그 모습 또한 내 일부였겠으나, 소동물이 공격받지 않기 위해 털을 부풀리듯 어느 정도는 과장되었다는 거다. 사소한 말버릇, 습관 하나하나 의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다. 시간이 쌓이자 내 대외적 이미지는 똑 부러졌지만 순수한 사람. 밝고 사랑이 넘치며 같이 있으면 편안한, 결론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싫었던 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관계라는 것에 대해 지독히도 골몰했었기에, 시간과 정성을 들여 차근차근 일궈낸 내 결과물이 꽤나 흡족했다. 다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온기를 받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근사한 일이었고, 소소한 도움들과 교류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그쯤에서야 깨달아서 더욱 그랬다. 그 관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토록 이 관계들이 소중한데, 그들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버림받지 않으려면 그들에게 필요한,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중요하겠구나.'
가치.
이 한 단어가 이리도 지난하게 나를 괴롭힐 줄, 27살의 나는 몰랐을 거다. 정말로.
"대표님. 저한테요, 장전된 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는 것 같아요.
쏴버리고 싶어요. 브랜딩 컨설팅을 하던 중 컨설턴트 A대표님께 불쑥 뱉은 말이었다. 오랜 연을 이어간 만큼 속내를 말해도 되는 사이였고, 어찌 보면 나보다 나를 더 들여다보는 분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을 거다. 다소 황당해 보이는 말에도 A대표님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셨다. 아마 불안해 보였겠지. 횡설수설 부자연스럽게 말을 쏟아내는 내가.
당시 이번 시즌에 뭘 표현하면 좋을지 주제를 정하던 작업을 하고 있던지라, 대표님은 그것과 관련하여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셨다. 장전된 총알 중 뭘 가장 하고 싶냐고 물었고 나는 나체로 비 맞기, 나체로 바람 쐬기 같은 다소 선정적인 답변을 내뱉었다. 지친 심신을 그냥 다 벗어던지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남이 볼 땐 미친년과 다름없을 모습이겠지만.)
답답함이 몰려올 때면 나는 항상 이렇게 이상해 보이거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누군가를 다치고, 아프게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다. 지성체로서 법과 윤리, 도덕을 넘진 않지만 일반적으로 하지 못했던 일들. 그러니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작게는 비 맞기,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 가기부터 크게는 담배 피워보기, 타투해보기, 급 여행 가기, 나체로 수영하기 등등.(나머지는 상상에)
그렇다고 내가 당장에 알몸으로 거리에 뛰어나가 바람을 만끽할 리는 없었다. 자유롭다한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마음도 없고, 댓바람부터 신문 기사나 유튜브에 올라올 마음도 없었으니까. 당장 어디 촌구석으로 떠날 시간도 없었던지라 바람이 많이 부는 까만 밤, 나는 알몸으로 베란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사위가 어두웠고 어슴푸레한 하늘에 인공위성 하나만 반짝거렸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훑고 지나가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그랬다. 아주 실망스러울 만큼.
어느 천재 예술가처럼 대단한 걸 느끼고 놀라운 작업물을 낸다거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다못해 그토록 간절하던 해방감을 갖는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웃기게도 내게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현실감이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순간인가. 한참을 가만히 누워있다가 꼼질꼼질 옷을 입었다. 상상이 주는 환상이란 이토록 막연한 것을. 정말 이토록 별 것 아닌 것을. 나 또한.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환상을 덧씌우며 살았나 싶었다. 그러니 답답할 수밖에. 물론 깨달았다고 해서 현실의 내가 갑자기 득도한 마냥 모든 사회적 탈을 벗어던지고 내 맘대로 살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세상을 조금 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마음속에 싹을 틔웠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던 나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고, 완벽함에 덜 집착하게 됐다.
아, 조금 더 솔직해진 것도 포함해서.
몇 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대외적인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를 50% 정도 줄인 것 같다. 여전히 나는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답변도 내리지 못했고, 집착을 온전히 버리지도 못했다. 브랜드를 쉬게 되는 순간에도 나의 가치가 스러져 버리는 건 아닌가 괴로워했으나, 의외로 고통은 짧았다. 내 안에 싹 틔워뒀던 작은 계기가 어느덧 성큼 자란 덕도 있었고, 이즈음 발리에서 했던 일탈 덕에 깨달은 게 있어서기도 했다.
야외에 커다란 수영장이 딸린 풀빌라였다. 프라이빗을 강조한 리조트다 보니 사방에 높게 담장이 쳐져있는 근사한 공간이었다. 풀장 앞에서 기대에 찬 눈빛으로 J를 돌아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느긋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제는 내 남편이 된, 나의 오랜 연인.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채 준다는 연인을 둔 건 축복이다. 그래서 풍덩 뛰어들었다. 아침 햇볕이 반짝이는 푸른 수면 위로, 아무것도 입지 않고.
우습게도 그때서야 나는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던 해방감을 느꼈다. 언제나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간의 고민들이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것처럼 느껴졌다. 떠 있는 몸이 가벼웠고, 온몸 구석구석 닿는 차가운 물살이 기분 좋았다. 그 생경한 기분에 아 그렇구나, 불현듯 깨달았다. 어느샌가 단단해진 마음이 내게 해방감을 선사했다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누군가의 나도 아닌, 오롯한 내가 나에게. 온전한 내가 나에게.
자유로운 팔다리가, 차가운 물살이, 머리 위로 떠있는 햇살이 기꺼웠다. 언제나 나를 괴롭게 하고 눈물짓게 했던 뜨거운 여름의 계절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크게 웃었다. 진짜 내 얼굴로. 한여름처럼 환하게.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