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당신의 그늘 #3
살다 보면 일상에서의 작은 장면이 유달리 뇌리에 콱, 박히는 순간이 있다. 찰나임에도 영원히 기억되어 반복 재생되는 어떤 사건이랄까.
내게도 그런 기억이 하나 있다. 구간 반복이 걸려있는 영상처럼, 눈을 감으면 종종 재생되는 낯선 남자의 얼굴.
평상시와 다름없이 작업을 위해 종로 3가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 길을 걸을 때 나는 주변을 보지 않고 가야 할 방향만 보며 빠르게 걷는 편인데, 그날따라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옆으로 매는 큰 숄더백을 들고 있던 터라 부딪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살필 때였다. 그 남자를 마주친 것은.
무심코 간 시선이었다.
초겨울의 추위가 매서운데도 옅은 베이지색 자켓만 덜렁 걸친, 인상이랄 게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고 평범한 무채색의 남자. 맞은편에서 느리게 걸어오던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왜인지 그 모습이 눈에 밟혀 조금 더 주의 깊게 본 것 같다. 그리고 그때야 나는 남자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차마 가던 길을 멈추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긴 앞머리를 커튼처럼 치고 그 안에 숨어 울었다. 잔뜩 붉어진 눈시울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 덩어리를 묵묵히 소매 끝으로 누르면서, 작은 흐느낌조차 없이.
순간 보면 안 되는 걸 본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숨기 위해 만들어둔 공간을 의도치 않게 침범한 느낌이랄까. 타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을 훔쳐본 것 같은 죄책감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속으로 되뇌면서.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남자는 사라져 있었고, 그제야 꿈에서 깨듯 나도 가던 길을 갔지만, 왜인지 그 장면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버렸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날 정도로 말이다.
그도 어딘가로 돌아갔겠지. 그리고 애써 웃음 지을 것이다. 울음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씩씩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괜찮은 모습으로.
병신.
집에 와서 그 남자가 생각날 때면 그렇게 뇌까렸다. 울 줄도 모르는 게. 그렇게 아닌 척 해봐야 뭐가 달라진다고. 병신, 병신. 바보 같은 놈.
하릴없이 욕을 하고 나면, 먹구름처럼 슬픔이 몰려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그래서 인정해야만 했다. 그에게 나를 투영했다는 것과 매서운 욕설을 받고 있던 주체는 사실 나였다는 것을.
울 줄 모르는 사람들은 소리 내는 법도 모른다. 마음에 병이 나서 첫 상담을 받았을 때가 그랬다. 상담 내내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래, 마치 그 남자처럼. 벌게진 눈시울을 휴지로 꾹꾹 누르기만 하면서.
선생님은 내가 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끝내 타박하셨다. 우는 법도 모르면서 뭘 우냐고. 그러니 참지 말라고. 괜찮다고.
그 말 한마디에 둑이 터지듯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갓난아이가 첫울음을 터트리듯, 내 울음소리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펑펑. 우습게도 그제야 나는 진짜 운다는 게 어떤 건지 이해했다. 탈 난 음식들을 게워내듯 한바탕 쏟아낸 내 설움이 목소리가 되고, 물방울이 되어 날아갔다. 케케묵은 감정이 울음 한 번에 모조리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한결 가벼워졌다. 그거면 됐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문득 그 남자가 떠오른다. 혼자서 무언가를 이겨내려 아등바등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더 꼭꼭 감춰버리는, 작고 초라한 어른아이. 작고 초라한 나.
그러면 나는 눈을 감고 종로 3가 뒷골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닿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의 모든 어른아이를 안아주듯, 양팔을 쭉 펴고 온 힘을 다해 체온을 나눈다. 괜찮다, 괜찮다 작게 속삭여주면서. 드넓은 우주에서 이 사랑이 바람을 타고 언젠가 우리에게 닿길 바라면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가두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기에, 당신이 당신을 더 사랑해 주었으면. 내가 쓰기 시작한 이 글들이 나와 같은 우리에게 닿고, 우리가 모여 우리를 치유하며, 빛만큼 따스한 울타리가 되어주기를.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