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혐오

이토록 아름다운, 당신의 그늘 #2

by 디더블유비

우울한 너를 사랑해 #1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어요. 여름은 너무 더워서 싫지 않아요?"


막 주문을 마치고 온 여자가 옆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허허, 웃었다.


"그래도 뭔가 푸릇푸릇한 게, 여름이 주는 맛이 있어서 좋아요. 겨울 되면 또 그리워질 걸요."

"그건 또 그렇지, 하하. 휴가 어디로 가세요?"


둘은 잠시간 예정된 휴가 일정을 시시콜콜 나누다 음료가 나오자 자리를 떴다. 햇볕이 쏟아지는 바깥 풍경 속으로 웃으며 걸어 나가는 두 사람. 여름은 더워서 싫다더니, 햇빛 아래 두 사람의 얼굴은 마냥 환하기만 하다. 괜스레 울적해진 마음에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초코칩 스무디를 쭉 빨아 우물거리다, 시간을 체크했다. 맡긴 물건을 찾으러 갈 시간이다.


종로 3가 귀금속 거리 뒤편, 촘촘한 골목 사이로 주얼리 관련 업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이곳은 내가 주얼리 브랜드를 시작하기 전부터 거진 8~9년을 다닌 길이었다. 이 날의 행선지는 도금집과 주물집 두 곳. 익숙한 골목을 지나 오래된 거래처였던 도금집 앞에 도착해서 나는 습관처럼 호흡을 골랐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사장님! 제거 다 됐나요?"


웃자. 할 수 있는 가장 화사한 얼굴로, 그늘 한 점 없이.






"아유, 00 언니는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 거의 다 됐어. 밖에 덥지? 이거 마셔."


마주 웃으며 사장님이 냉장고에서 음료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뭘 이런 걸 다 주냐고 괜히 너스레를 떨며 기다렸다는 듯 곧장 뚜껑을 따서 들이켰다. 딱히 목이 마르거나 참을 수 없을 만큼 더운 것도 아니었으나 그냥 그렇게 했다. 당신의 배려가 지금 내게 딱 필요했다는, 상대방의 센스를 긍정하는 나름의 보답 방식이랄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사이 내가 맡겼던 제품이 나왔고, 나는 인사 후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주얼리 공장들은 대게 다닥다닥 붙어있기 때문에 주물집도 금방 도착했다. 반투명한 문을 밀고 고개를 쏙 내밀자 나이가 지긋한 남자 사장님이 방긋 미소로 화답한다. 으응, 왔어?


카운터에 내 물건을 펼쳐 보이는 사장님이 도금집과 비슷한 말을 하신다.


"안 더워? 오늘도 씩씩하니 보기 좋네. 자, 내가 몇 개 더 해줬어. 서비스."

"우와, 진짜요? 너무 감사해요, 역시 우리 사장님이 짱!"


감사한 마음에 한층 더 씩씩해진 얼굴로 익살스레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짧게 수다를 떨다 주섬주섬 지갑을 꺼낸다.


"아잇, 잔돈은 됐어!"

"앗 그래도 받으셔야죠! 자꾸 이러시면 저 죄송해서 못 와요!"

"몰라, 몰라."


투닥투닥. 싱겁게 끝나는 다툼의 패배자는 언제나 나지만, 동시에 승리자도 나인 요상한 애정다툼. 다음엔 꼭 받으셔야 해요, 아쉬운 듯 인사를 나누곤 웃으며 문을 나섰다.


훅, 뜨거운 바람이 피부를 감싼다. 아, 여름이다.






일정을 무사히 마친 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동안 서서히 목이 졸리는 기분을 느낀다. 낯선 일도 아니다. 애정이 듬뿍 담긴 쾌활한 대화를 나누었던 젊고 씩씩한 사업가는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고, 와르르 허물이 벗겨진 괴상한 얼굴만 빛 아래 비척인다.


뜨거운 햇볕이, 더운 바람이, 끈적한 습도가 나를 힘들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여름이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름이 주는 생명력, 그 생기와 사방을 봐도 숨을 곳 없이 밝고 또렷한 고채도의 세상이 힘겨웠다. 그 푸릇푸릇함이 어찌나 생동감 있던지, 모든 곳이 이렇게 찬란한데 너만이 까맣다고 온 세상에 고자질당하는 기분이라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태양 아래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너무나 끔찍해서, 나와 반대되는 세상이 낯설고 무서워서.


햇빛을 쬐면 죽어버리는 음지식물처럼 나는 버스 정류장 구석에 숨어있다가 서둘러 버스를 탔다. 분명 더운 날임에도 자꾸만 어딘가가 시려서 애먼 팔만 쓰다듬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들이 게임 그래픽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곳에, 저기는 저곳에. 더위에 얼굴을 찌푸린 사람들, 웃고 있는 사람들, 사진을 찍고,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햇살을 머금은 푸른 잎사귀와 갓 올라오며 옅은 형광빛을 띠는 풀잎들. 절규 같은 매미소리, 신경질적인 클락션 소리, 버스의 자잘한 진동과 누군가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노랫가락 위로 두근두근, 내가 살아있는 소리가 작게 덧입혀진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호흡을 가다듬고 내리자마자 뛰듯이 집으로 향한다. 아무도 나를 쫒고 있지 않은데, 자꾸만 걸음이 빨라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온 집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밤이다. 그럼 이 싱그러운 세상도 잠시간 침묵하겠지. 어둠이 내려앉으면 나와 다를 게 없을 거야. 나도 이곳에 속할 수 있어.


강아지를 끌어안으며 소파에 모로 누웠다. 강아지를 끌어안은 손바닥 위로 쿵, 쿵, 조그마한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내 것이 아닌 것. 그러니까, 잠시나마 나를 지워둘 수 있는 시간.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땀이 조금씩 났다. 채 느끼지 못했던 더위를 서서히 느끼며 중얼거렸다. 괜찮다. 괜찮아.



정말이지, 나는 그 해 여름이 너무나 싫었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