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과 운전면허

My turn

by 향작

육아 퇴근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이를 재우면 퇴근일까. 자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거실로 나와 넷플릭스에 로그인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상을 틀어놓은 채로 빨래를 개는 등의 단순 노동을 하는 것은? 야근인가?

돌연 자던 아이가 깨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건, 재차 출근인가? 부러 퇴근하지 않은 상사의 예기치 못한 (아니 언제나 예견하고 있는) 호출인가.


육퇴라고는 하지만 실상 퇴근은 없는 하루의 끝자락을 붙잡고 빨래를 개고 간신히 커피 한 잔을 타서 책상에 앉는다. 이 순간 내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쓴 커피가 입맛에 딱이라는 사실과 벌써 꺼내 신은 수면 양말의 질감이 좋다는 사실 그리고 크게 졸리지 않은 몸 상태 정도다.




작은 아이는 9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15개월에 첫 입소였던 것인데 조금 더 가정보육을 해도 좋았겠지만 나도 내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내 시간이라고 해봐야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7시간을 모조리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획한 집안일을 하는 시간(화장실 청소 같은 큼직한 일들이 아니면 상당하진 않다), 빠르게 장을 보고 하원 전에 두 아이의 저녁 식사를 만들어 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오롯이 남는 건 한 3-4시간 정도가 된다. 너무 피곤해서 눈을 붙이고 나면 홀랑 증발해버리고 마는 시간, 어딘가 아파서 병원을 다녀온다 쳐도 대기하다가 절반이 뚝, 날아가 버리는 정도의 시간이다. 누군가는 그만한 시간이라도 어디냐고 하겠지만 책을 읽기 시작해도 잡생각을 밀어내고 온전히 집중하기까지 예열이 필요하고, 글을 쓰고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도 뚝딱 완성된 글이 써지지 않는 나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정도다.


그런 아쉬운 시간 안에서도 꼭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첫 째는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고, 둘 째는 운동이다.

조금 아픈 일로 병원 가는 건 시간 아깝고, 끼니도 하루에 한 끼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충인데 운전면허와 운동만큼은 꾸역꾸역 해야 할 것 같다.

더운 여름날 장마가 지난하거나, 한겨울에 아무리 옷깃을 여며도 칼바람이 살을 파고들 때 두 아이를 도보로 등원시키는 일은 할 만큼 한 듯하다. 다른 계절과 날씨라면 모를까, 어른도 걷기 힘든 순간에 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거나 걷게 하는 건 아무리 봐도 엄마가 무능력해서 아이들이 고생하는 일 같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운전을 해야 한다.


운전면허가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면 운동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다.

두 아이를 양육하며 힘들단 핑계로 먹고 마신 게 남편과 나의 허리둘레에 고스란히 쌓였다. 결혼하기 전보다 10kg은 족히 쪘다. 건강하게 나를 관리하는 일은 게을리하면서 매 밤마다 순간의 스트레스를 푸는 일과 즐거움에만 몰두해서 살았다.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내 건강을 위해서라도 테트리스처럼 내장에 지방 쌓기는 그만해야 한다.

주변에서 필라테스를 많이 권했지만 내심 격한 운동이 하고 싶었다. 몸을 보다 많이 움직이고 땀을 흠뻑 흘리며 숨이 차서 금방이라도 드러누워버리고 싶은, 그래서 정말 죽겠다, 말고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운동이 하고 싶었다. 뭘 하지 고민만 하다가 단순히 다이어트만을 목적으로 헬스장을 물색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복싱은 어떠냐고 넌지시 던졌다. 그리고 번뜩, 떠올랐다. 첫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 복싱을 하자고 마음먹었던 일이. 둘째를 임신하는 바람에 복싱을 고사해야 했던 일이.

나는 복싱이 배워보고 싶었던 마음에 다시 불을 지폈다. 이미 복싱장에 들어서 스텝을 밟고 줄넘기를 뛰고, 링 위에 올라 글러브를 꼈다. 아마추어 대회에도 나가 얼마간 맞고 눈두덩이가 부을 대로 부어 남편이 걱정하는 모습도 상상했다. 어린이집에 두 아이를 등원시키다 선생님들이 놀라서 묻는 안부에 히죽히죽 웃으며 복싱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모습도 그려봤다. 그런 장면들이 재미있었고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춤을 췄다. 얼른 시작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작은 아이까지 어린이집에 등원을 하기 시작한 건 이미 한 달이 넘었지만 나는 운전면허 학원을 등록하지도 그렇다고 복싱장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9월의 대부분은 어린이집 적응 기간으로 길어봐야 점심까지만 먹고 하원을 했고 이후 일주일은 작은 아이가 장염으로 내내 병원 신세를 졌으며, 퇴원을 하니 추석이었다.


안달 난 마음은 다행히 쉽게 가라앉았다.


명절이 지나니 작은 아이가 코감기에 걸렸는데 오늘은 38도가 넘는 발열에 피까지 비치는 노란 콧물이 줄줄이다. 게다가 큰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내내 눈을 비볐다더니 하원 후에 간 안과에서 바이러스성 결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전염성이 있고, 심하면 한 달도 간다는 의사의 말에 헛웃음이 난다. 아침저녁으로 소아과와 안과를 오가자니 몸이 지치는데 큰 아이를 내일부터 집에서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하다. 이렇듯 두 아이에게 엄마의 손길이 절실할 때마다 내가 원했던 무언가를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갑갑한 일이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느냐고, 나는 엄만데.., 내가 전부인 세상에서 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 두 아이의 엄만데. 오늘도 빠르게 마음을 달래 보지만 울컥하는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불쑥 아침에 달력에 적어둔 내일과 다음 일주일의 계획들이 생각난다. 어쩔 수 없이 또 큰 아이를 등원시킬 수 있는 날 이후로 미뤄야겠구나 싶어 조금은 씁쓸해진다. 부디 작은 아이가 결막염을 고스란히 옮는 일만큼은 없기를, 바라고 바라는 것 말고는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없다.



왜 굳이 복싱을 배우고 싶은 것일까. 겁이 많아서 날아오는 공도 제대로 못 잡고, 피하는 것도 못해 눈이나 질끈 감고 마는 내가, 어째서 복싱이 하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무자비하게 날아드는 펀치처럼 예기치 못한 일들을 받아내기만 하는 하루 속에서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계획한 대로 주먹 한 번 휘둘러보고 싶은 건 아닐까. 주먹 한 번 휘두르고 나가떨어지더라도 아, 이렇게 죽어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벅찰 정도로 오롯이 나로서 살아갈 날을 기다리는 건 아닐까. 내 차례가 다가오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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