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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틴 Aug 19. 2021

방독면과 마스크

스멀스멀 떠오르는 군대의 기억


군대 훈련소 때의 일이다. 4주 차엔 화생방 훈련이 있다. 방독면 주머니를 다리와 허리에 묶고 있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빠르게 꺼내어 쓰는 연습을 한다. 화생방 상황에서는 속도가 중요해서, 평소에 방독면을 잘 쓸 수 있게 준비해두라고 조교는 설명했다. 북한은 생화학 무기를 사용해서 우리나라가 어쩔 수 없이 방독면 기술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한다. 나는 이 20년은 묵은 방독면이 ‘최신’ 기술이라고 설명하는 조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방독면 체험이었다. 가스실이라고 써놓은 밀폐된 공간 안에 기침과 눈물을 유발하는 CS탄을 피운다. 피우는 것도 아니고, CS탄 알약을 불판 위에 굽다 보면 연기가 나온다. ‘방독면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훈련 목표였다. 앞에 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희뿌연 연기로 보이지 않는 가스실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숨을 쉬자 정말로 아무 느낌이 나지 않았다. 방독면 필터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신호가 떨어지면 앞의 필터를 손으로 돌려 빼서 머리 위로 들어 올려야 했다. 나는 잔머리를 굴려 필터를 빼기 전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나 이 전략은 1초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CS탄의 힘은 강했다. 내 옆의 동기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출구로 뛰어가 문을 두들겼다. 얼핏 살려주세'요’라고 한 것 같았다. 가스는 코 안쪽 깊숙이 흘러들어왔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물과 콧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그 와중에 군가를 부르고 스쾃 몇 번을 반복했다. 가스실의 군인들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지옥 같던 찰나의 시간이 끝나고 훈련은 옆 사람끼리 방독면 필터를 갈아 끼워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가스 체험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방독면 안쪽의 사람은 생각보다 무너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방독면의 기능을 과신한 나머지 몰래 들어온 가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방독면뿐만 아니라 마스크도 비슷하다. 바이러스를 막고자 쓴 마스크로는 내면의 우울이 나를 잠식하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이전엔 사람들과 관계를 통해 우울함을 해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신경을 쓸 때는 그 사람이 마스크를 벗고 있을 때뿐이다. 그 사람이 언제 마스크를 다시 쓰나 하고 불편한 시선을 보낸다. 기쁨도 슬픔도 서로 보기 힘든 사회, 서로의 감성을 나누기 어려운 사회가 된 것이다.


우리는 마스크 안쪽의 서로가 얼마나 연약한지 안다. 이제는 마스크 바깥의 서로를 보듬어줄 차례다. 가스실에서 군인들이 나오면 손과 팔을 높이 들고 위아래로 흔든다. 흡사 날갯짓과도 비슷한 이 몸짓은 몸에 묻은 CS탄을 날려버리기 위함이다. CS탄도, 우울함도 쉽게 날아갈 수 있다. 그리고 서로의 수통을 꺼내 얼굴에 물을 흘려준다.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눌 때, 아픔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의 내면은 성장한다. 코로나가 할퀴고 간 마음을 공감이란 물로 축여주자. 단, 훈련을 마치고 나서 눈물과 콧물은 깨끗이 닦는 걸 잊지 않도록 하자. 서로의 체면과 위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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