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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책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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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writer Jun 26. 2022

산책일기 17. 나의 세계, 나의 홀릭

연재 에세이



이제는 산책을 나올 때마다 무더위의 조짐이 역습한다.

파릇파릇한 햇살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곧 고행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시든 예감을 하는데

너르게 퍼진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천연 차양이 등장해 그 생각이 무색하게끔 만들어 시원하다.

열 양산이 부럽지 않다.


그렇게 무더위 속을 다시 걷자니 초록과 세심한 필치로 어우러지는 저 멀리

주차된 트럭 아래로 펄럭이는 <성주참외>라는 현수막 속 단어가 그토록 먹음직스러운 참외를 연상시킨다.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며 나 역시 무슨 새로운 생각이 탄생할까 싶지만,

여기에만 유독 기막히게 아름답고 독특한 미장센이 존재할 리도 없지만,

자연은 놀랍도록 매일 같은 자리에서 다른 형상을 소개한다.

그리고, 새가 어디에선가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톡 튀어 오르며 나뭇가지를 미련 없이 울리고는 떠난다.


그 개체들 사이를 무더위로 움푹해진 채로 누비다 생각했다.

한때를 빛내고 불태우고 시들어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따뜻한 햇살과 압살하는 태양은 빛의 양면이니까.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지고 다시 피어나는 그 개체는 저번의 그 개체일까?

문득 자연에 내가 부여한 영원성, 그 우러러봄, 나의 열등감이 착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들의 삶도 그저 인간과 비슷한 단 한 번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에서는 나무가 이렇게 수형 잡기를 하고 있었다.

나무에겐 이 과정이 아름다움을 위한 썩 만족스러운 과정일까, 고통일까.

왠지 모르게 인간의 코르셋과 비슷해 보였다.

그렇다고 딱히 고통스러워 보였다는 뜻은 아니다.

감정을 이입한다는 것은 시선을 통해 나의 감정을 대리할 사물을 찾는 일이니까.

내가 고통스럽게 느꼈다고 곧 그게 나무의 고통스러운 일이 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냥 나의 고통일 뿐일 때도 많다.

연민의 착시에 빠지지 말자.




늘 물이 흐르던 계곡이 단순한 돌담길처럼 무언갈 지나치게 잘 알다 못해 빠삭하게 알아버려 흥미를 잃은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 위를 부드러운 공단(貢緞)을 빌려 입은 듯한 동물의 등 털이 대지 전체를 감싼 채 긴 잠을 자며 호흡하는 듯이 온건하며 윤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요즘 달라진 점이라면, 일과 관련된 작업을 늘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 기회가 늘어났다.

평소에 혼자 있다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내가 빠져 사는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정말 많이 다르구나'라는 걸 많이 체감한다.


하지만 그게 불편하거나 어렵거나 싫지는 않고,

그 세계에서는 그런 채로 살아가면서 내가 사랑에 빠져 있는 또 다른 세계에서는 계속 그 집중도와 이 세계의 신비감,

나만의 현실감을 충분히 누리고 향유하면서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일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지금 그 일이 산책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사유할 자유 역시 인간의 권리이다.

그 현실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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