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혼마라비해?> 리뷰
<혼마라비해?>
-ほんま/LABI/해/?
잘 지내시나요?
아르코 소극장 안의 무대는 소박하고 아늑했다. 2009년 일본 자이니치의 공간을 그리기에 적당한 공간인 듯했다. 관객 연령층도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했다. 낯설고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굵은 파마머리에 남성스러운 스타일인 한 여자분이 무대 앞에 섰다. 그녀는 자신을 이 연극의 작가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일본에 머물러있을 때 봐왔던 자이니치들의 삶을 담은 연극이니 재밌게 봐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작가분이 굉장히 매력적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 분이 연극의 주인공 역할이라는 게 큰 재미요소였다.
극 주제는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처음 연극의 시놉시스를 봤을 때는 북한, 간첩 등의 단어가 나와서 살짝 의아했다. 그리고 당최 알 수 없는 "혼마라비해"라는 극 이름. 어떤 스토리가 전개 될지 궁금했다.
일본 극단의 일을 도우러 재일교포의 가정에서 살게 된 주인공 '신영주'는 집을 방문한 첫날밤, 안방 벽에 걸려있는 김부자(북한 대통령들)의 액자를 보고 한숨도 자지 못한다. 이들이 간첩일 거라는 오해를 하지만, 사실은 더 웃픈 이야기가 숨겨져있었다. 바로 이들은 북한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가 분단국가가 되면서 일본 내에서도 북한과 대한민국 부류가 나눠졌지만, 많은 자이니치들이 의도치 않게 북한식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초반에 '우진'이라는 인물의 말투가 영 낯설게 느껴졌던 것도(마치 북한 아나운서 딕션..) 그런 이유에서였다. 인물 대사 중에 중학생 역사 시간에 배웠던 '육두품' 이란 단어가 나온 것도 기억에 남는다. 재일교포 2-3세대가 한국의 역사교육을 받는 다는 게 새삼 낯설고 신기하게 들렸던 것 같다. 물론 형인 '현규'가 책을 보고 우진이에게 직접 가르쳐주는 걸 보면서, 일본 재일교포들의 교육 환경이 쉽지 않겠구나 생각도 들었다.
<혼마라비해?> 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재일교포 2세대 '현규'였다. 음악에 매달려사는 철부지 캐릭터라고 처음에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자이니치로서 겪는 갈등과 고통들이 더 눈에 밟히고 아팠다.
1세대인 광식이 아저씨와 지숙 언니는 한국은 요즘 어떤지, 한국 사람들이 재일교포들에게 관심은 있는지, 항상 한국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현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다. 그는 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은 없지만, 한국을 사랑하는 부모님 곁에서 자랐다. 아버지께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우리말과 문화들을 배우고 익혀왔다. 그리고 어쩌면 그 안에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신념' 또한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믿어온 신념. 그 신념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일본인으로 귀화를 선택) 이 왔을 때, 현규는 오래도록 슬퍼했다. 이것은 국적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든 또 다른 영역일 것이다.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적부터 그렇다고 믿어온 것들이기에, 그러한 믿음을 부정하는 게 쉽지 않은 듯 했다. 종교에서도 개종하거나 자신이 믿는 신이 부정당하면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극의 후반부에서 영주를 한국으로 보내고 혼자 남은 광식이 아저씨는, 집을 떠나기 전 tv에서 하는 한일 야구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된다. 살던 곳을 떠나기 전, 조용히 한일전을 보던 광식이 아저씨는 "모르겠다... 그냥 아무나 이겨라." 라는 말을 내뱉곤 흐느껴 운다.
이 대사를 통해 많은 재일교포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소속감" 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 곳에 소속되려면 국적을 선택해야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극의 한 장면 중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인가?" 방송 mc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현규에게 한국과 일본에선 비난이 쏟아진다. 한편으로는 그의 머뭇거림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살면서 확실하게 선택할 수 없는 것 또한 있으니깐. 그리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신념은 오랫동안 가져왔던 것이지만, 그가 살아가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터전은 바로 일본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확실히 선택해야 한다? 정말 힘들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선택 하게 만든다.
한국인지, 아니면 일본인지.
그런데 웃긴 건 선택을 해도 문제가 있다. 일본으로 귀화를 선택한 다고 해도 그들이 받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 아마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라며, 양쪽 나라의 헤이트 스피치는 계속 되지 않을까? 그래서 극 마지막 부분, 지숙과 현규가 의외의 나라인 라트비아로 떠나는 것은 주제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그들이 필요한 건 확고한 '국적' 보다는 '소속감'이라고. 사실상 그들이 제일 힘든 것은 어느 한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지 그러한 상황에 놓였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지숙이 과거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동포로서 환영받았던 그 기억, 처음으로 자신이 소속된 곳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걸 보면, 그들에겐 어떤 국가를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 그들이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람답게 대우해줄 곳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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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숙과 영주가 대립하는 - 지숙이 남한보다 북한이 오히려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 장면에서 나도 같이 반성하게 되었다. 재일교포들이 당하는 차별은 우리가 북한을 독재 사상을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끔찍한 국가라가 생각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으니... 내가 그동안 해왔던 차별은 또 다른 나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보면서 울었다. 유독 많이 우는 사람들도 보였다. 2시간 가까이 되는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 부분에서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내 바로 앞자리의 관객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나서 박수를 쳤는데, 바로 재일교포 분이셨다. 또다시 소름이 돋았던 순간.
사실 이 말고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다. 한국말을 고집하는 1세대 광식이 아저씨,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지숙 언니, 가수로 유명인이 된 현규, 일본 학교를 다니는 막내 우진이, 그들을 지켜보는 영주. 이것은 이미 단순히 가상의 스토리가 아닌 현실이다. 재일교포 1세대와 2,3세대의 관점에서 그들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그리고 과연, 그들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혼마라비해?"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