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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근 Sep 24. 2021

말하자면 긴 ‘윌’의 이야기

제 목 : 세계를 향한 의지

원 제 : Will in the World

부 제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지은이 : 스티븐 그린블랫

옮긴이 : 박소현

출판사 : 민음사

출간일 : 2016년 4월 15일 (원서 2005년)

사 양 : 696쪽 / 145ⅹ215mm



이 예술가는 1564년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이라는 시골 마을의 가죽 장갑을 만들어 파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John)은 아들의 이름을 윌리엄(William)이라 지었다. 존은 그 지역의 주요한 공직을 역임했으며 시장직에도 일 년간 있을 만큼 신임이 두터웠으나,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은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16세기엔 영아 사망률이 꽤 높았음에도 이 아이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윌’은 십 대 중반까지 라틴어 교육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문법 학교에 다녔다. 그 이후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가는 바람에, 아버지 사업을 도왔든지 혹은 학교생활에 더 이상 흥미를 못 느꼈든지 간에 그의 공식적인 가방끈은 여기서 끊겼다. 그리고 윌은 열여덟 살, 그 시대에도 무척 이른 나이에 꽤나 급히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는 여덟 살이나 연상의 여인이었고 둘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앳된 청춘이 불쑥 가장이 되어 밥을 벌어야 했으니 얼마나 막막했겠는가. 희한하게도 결혼부터 1580년대 중반까지의 그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말하자면 길다.


1580년대 후반에 윌은 고향에 가족들을 둔 채 홀로 런던으로 상경했다. 유흥가가 몰려 있는 런던 근교의 작은 방에서 출발한 그는 영국의 수도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예술가는 섬세하면서도 끈질기게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쌓아 갔고, 그에 맞춰 부와 명성 또한 차근차근 쌓아 갔다. 오죽했으면 케임브리지대를 나왔으나 유흥가에서 막살고 있던 한 예술인이 그를 이렇게 표현했을까 : “벼락출세한 까마귀.” 물론 어려운 시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흑사병이 나돌아 도시가 마비되거나, 그를 후원하던 백작이 정치적으로 추락해 버리거나, 말년엔 그의 중요한 자산이 송두리째 불에 타 버리는 등등. 이것들 모두 말하자면 길다.


어쨌든 그의 예술 작업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수많은 평민들과 귀족들이 매일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지불했다. 1600년대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로 왕위가 교체됐을 때는 특히 국왕의 신임을 얻어 막대한 명성과 자금을 후원받았다. 그는 런던에서는 약간의, 고향에서는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으며 고향 땅에 있는 으리으리한 삼 층 저택도 매입했다. 그는 말년에 런던 생활을 접고 그 저택으로 들어와 자녀와 손자들과 매일 저녁 풍족한 식탁 앞에서 행복했을, 까? 그는 고치고 고친 마지막 유언장에서야 겨우 아내를 언급하는데, 그녀에게는 ‘두 번째로’ 좋은 침대만을 남겼다. 이 사람 참, 말하자면 길다. 윌은 1616년 4월 23일에 눈을 감았다.


그는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다. 그리고 스티븐 그린블랫의 『세계를 향한 의지』는 셰익스피어의 ‘말하자면 긴’ 생애의 이야기를 추적해 내는 책이다. 꽤나 특이한 이름 ─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발음해 봤을 때 좀 야해서 놀랐던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 에, 얼굴이 멋들어지게 나오는 45도 각도로 고개를 틀었지만 정작 까진 앞머리와 금색 귀걸이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 초상화. 퀴즈 프로그램에서 일반 상식 문제로 그 제목이 꼭 출제되는 4대 비극을 쓴 극작가.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이 책은 놀랍게도 술술 읽힌다. 한 인물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서적은 대개 따분하고 딱딱하게 마련이다. 가령 ‘셰익스피어 연구’, ‘셰익스피어 평전’, 혹은 ‘셰익스피어는 누구인가’라는 식의 제목이라면 책꽂이에서 뽑아 보기도 싫다. 겉표지 색깔도 열이면 아홉이 거무튀튀하다. 그런데 『세계를 향한 의지』는 제목부터 재밌다. 원제는 ‘Will in the world’인데, Will은 의지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윌리엄(William)을 줄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니까. 이 정도면 꽤 근사하고 유머러스하지 않은가! 겉표지 색깔도 밝은 다홍색이라서 산뜻하다. 그뿐만 아니라 위에서 말한 그의 초상화가 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 외모부터 매력 있다.


책 구성은 더욱더 매력 있다. 필요한 참고 사항이 가장 뒤쪽으로 몰아져 있고 주석이 본문 중에 전혀 없기 때문에 글 읽는 리듬이 깨지지 않는다. 또 저자가 전문 용어를 남발하지도 않고 평이한 단어를 적극 구사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인용하는 부분도 책의 분량을 늘리려는 불순한 의도 없이 적당한 길이와 횟수로 달아 놓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저자의 방대하고도 치밀한 고증에 있다. 전기류 서적이므로 너무도 당연한 말 같지만, 셰익스피어의 경우는 남달리 더 지독하다. 재산 내역, 세금 고지서, 법률 각서 등의 관료적 기록 이외에 그가 스스로 남긴 기록은, 정말이지 문학 작품밖에 없기 때문이다. 분실됐든 실제로 쓰이지 않았든, 그의 연극론이나 회고록, 심지어 편지나 일기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셰익스피어의 일생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와 연이 닿는 아주 사소한 흔적일지라도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그렇기에 셰익스피어를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그의 문학 작품을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이 작업을 멋들어지게 해냈다. 또 하나 더, 저자는 윌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철저하게 파헤쳤다. 헨리 8세의 성공회 창설부터 가톨릭교와 개신교 간의 처절한 갈등과 반목,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기의 경제·정치적 흐름, 제임스 1세로의 왕위 계승까지의 역사가 그의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꼼꼼하게 톺아 냈다. 특히 당시의 시대상과 4대 비극 작품을 대응시켜 셰익스피어의 내·외면을 재구성하는 책의 후반부는 그를 향한 저자의 깊은 통찰력이 집약된 하이라이트다.


『세계를 향한 의지』는 한마디로 아주 탄탄하다. 철저하고 끈질긴 탐구를 바탕으로 술술 써내려 갔기에 술술 읽힌다. 말하자면 긴데, 읽어 보면 안다. 그리고 읽고 나면 세상살이에 고달파하는 친구에게 이 정도는 으쓱거려도 괜찮다 : “내가 연극계에서 유명한 영국 사람을 좀 아는데, 그 사람도 그렇고 심지어 그 사람 친구 ─ 이름이 햄릿이었나 ─ 도 우리랑 똑같은 고민하며 살더라. 사느냐 죽느냐, 뭐 다들 이 문제 아니겠어?”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의 한 젊은이가 있다. 독자적인 재산도 없고, 강력한 가문 출신의 인맥도 없으며,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이 젊은이가 1580년 후반에 런던으로 상경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 자신의 시대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가장 위대한 극작가가 된다.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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