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하길, 우리네 세상은 동굴이고 우리는 동굴의 벽만 쳐다보도록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동굴 밖 존재들의 실체를 결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들이 동굴 입구를 지날 때마다 벽에 드리우는 ‘그림자’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실체의 불완전한 투영이요, 실체의 여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림자만 보아 왔기 때문에 그것이 세상의 실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동굴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동굴은 아주 깊고 길어서 밖으로 나가기가 매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구속되어 있는 존재일까? 인간이라는 미약한 생명으로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최소한 쇠사슬 같은 것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전부가 동굴 벽의 그림자뿐일지라도, 우리는 그림자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을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무기력하지도, 따분하지도 않다.
우리는 그림자를 가지고 논다. 우리는 가령 손을 들어 그림자끼리 겹쳐 보기도 하고, 몸을 원하는 대로 움직여 색다른 그림자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우리는 각각의 그림자마다 우리만의 상상을 자유롭게 부여한다. 그리고 우리는 고민한다 ─ 어떻게 하면 나의 상상, 나의 생각을 누구보다 더 매력 있게 만들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공유한다. 그림자는 실체에 의존하는 흐릿한 상이었지만, 우리가 가지고 놂으로써 독창적인 의미를 지니는 뚜렷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그곳이 동굴이든 어디든 우리가 누리는 생의 의미를 이야기할 줄 아는, 응당 그렇게 놀 줄 아는 존재인 것이다.
“소설은 일종의 그림자놀이예요. 현실이 실체를 드러낼 수 없으니, 대신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지요.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림자는 실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아요. 이 손으로 토끼도 되었다 여우도 되었다 하잖아요? 이런 묘미가 나를 소설로 이끌었나 봐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비추면서도,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던 그림자만의 재미있는 세계가 펼쳐지니 말이에요.” (207쪽)
소설은 그림자를 가지고 노는 아주 훌륭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글자로 표현되는데, 글자는 굉장히 인간적이다. 인간만이 글자를 사용한다는 우월주의적 주장 때문이 아니다. 한 인간의 마음속 상상을,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이해 가능하도록 외면화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설은 인간적인 매력을 품고 있다. 그림자로부터 얻어 낸 심상을 인간에게 유의미한 가치로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하게 매혹적일 단어와 문장, 줄거리를 구성하려는 의지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우리의 생명과 삶의 의미를 글자로써 가장 우리답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니까 너무나 인간적인 놀이 중 하나인 것이다.
『꽃그림자놀이』는 소설을 금지했던 정조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지엄한 왕의 명령일지라도 소설은 결코 금지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도망간 노비이든 독수공방의 과부든, 헌책방의 상인이든 돈이 없는 양반이든, 한 나라의 왕이든 그들의 후손이든 모두 동굴 속의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나고 죽으면서 우리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길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세상에 대해 너무나 우리답게 이야기하기, 곧 소설하기를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한 적이 없다. 『꽃그림자놀이』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우리에게 소설하기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즐거운 놀이인지 일깨워 주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