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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근 Sep 05. 2021

침몰하는 현대 사회에서 희망을 외치다

제 목 : 불안한 현대 사회

원 제 : The Malaise of Modernity

부 제 : 자기중심적인 현대 문화의 곤경과 이상

지은이 : 찰스 테일러

옮긴이 : 송영배

출판사 : 이학사

출간일 : 2001년 2월 17일 (원서 1991년) - 개정판 나옴

사 양 : 190쪽 / 140ⅹ215mm          



2015년 제정된 베르그루엔 철학상은 철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집 없는 억만장자’로 유명한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이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에게 수여하는 상은 없다는 점에서 이 상을 착안했다고 한다. 상금은 백만 달러이고, 심사위원단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와 마이클 스펜스 뉴욕대 교수를 비롯한 아홉 명의 저명한 학자들이다. 그들의 심사 모토는 무려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 찾기.’ 


2016년 12월 1일, 오백여 명의 후보자들을 제치고 그 첫 번째 소크라테스가 선정되었다. 제1회 베르그루엔 철학상 수상자는 바로 ‘찰스 테일러’다. 그는 캐나다 맥길대의 명예교수로, 책의 앞날개 소개에 따르면 “그는 현대 도덕 철학 및 정치 철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불안한 현대 사회』는 찰스 테일러가 1991년에 캐나다의 라디오 방송에서 강연한 내용을 엮은 책으로, 오늘날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의 근원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분석하고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이 추구해야 할 올바른 지향점을 탐구한다.


불안의 첫 번째 근원은 ‘개인주의’이다. 근대 이전에는 만물의 거대한 우주적 질서 속에 인간에게 부여된 고유한 위치가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결코 거스를 수 없고 거슬러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인간은 앞선 절대적 질서를 부정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발현하는 일은 각 개인이 책임 있는 선택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는 실천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전통적인 초월자들이 사는 산꼭대기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속’으로 내려간다. 이와 같은 주체의 내향적 전환이 개인주의의 본질이며, 그에 따라 우리는 더 가치 있는 삶을 살려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고 시대적으로 요청받는다. 저자는 근대성(modernity)에 내재된 이러한 도덕적 이상을 ‘자기 진실성(Authenticity)’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자기 진실성이 지금의 현대 사회에 이르는 동안 왜곡되어 왔고 그 왜곡이 강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어떤 선택이든 그것이 스스로의 자유와 의지에 따라 내려진 결정이라면, 오늘날의 우리는 그 선택의 가치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고 또 가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이상을 (1)결국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나 자신뿐이며 (2)그렇기에 (타인을 포함한) 어떤 타자의 개입도 정당화될 수 없고 또 무의미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치를 부여하는 근거가 자신이 선택한 그 무엇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선택했다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의 온건한 상대주의적 관점이 자기 진실성에 대한 저질적인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진정한 자기 진실성의 이상은 사실 “자기 선택을 넘어서는 다른 사항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58쪽)해야만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다 유의미한 삶을 ‘객관적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도덕적 지평이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려는 노력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선택 그 자체가 결정적이어서 모든 선택이 동등하게 가치 있다는 주장은 선택들 사이의 객관적인 중요도 차이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자기-선택을 오히려 아주 하찮은 관념으로 만든다. 자신이 선택한 행위가 선택받지 못한 다른 행위들보다 더 훌륭한 의미의 지평에 놓여 있을 때만이 그 선택은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오늘날 성행하는 개인주의는 한 개인의 자아를 뛰어넘는 이러한 도덕적 지평들의 존재마저 부정함으로써 자기 진실성의 이상을 왜곡한다. 전통적 질서의 구속에서 벗어나면서 더 나아가 이제는 인간 개개인의 삶에 어떠한 외재적 개입도 존재해선 안 된다는 사유가 현대 사회를 지속적으로 잠식해 온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욕구나 열망 너머에 있는 것 ─ 그것이 역사, 전통, 사회, 자연, 혹은 하느님이라 할지라도 ─ 에서 오는 요구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혹은 부당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경향”(79쪽)에 빠진 채, 오로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구축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협소한 자아 속으로 침몰하고 있다. 의미의 지평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원자주의적 사고방식은 인간관계를 정체성 형성에서 그저 부차적인 도구 정도로만 여기는 태도로 이어진다. 타인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논증하기를 인간관계는 인생에서 결코 임시적이거나 수단적일 수 없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반드시 ‘언어’ ─ 사랑, 예술과 같은 표현 방식까지 넓게 포괄하는 ─ 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 언어들이란 본질적으로 타인과의 상호 대화 속에서만 생성될 수 있고 습득될 수 있다. 딱 한 명만 사용하는 언어는 무의미할 뿐이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삶의 행위에는 이미 타인의 개입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다. 또한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사실 한 생애 동안 끊임없이 변화한다. 요컨대 평생의 자기-정의 작업은 “타인들과 나의 대화 관계에 결정적으로 의존”(67쪽)할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관계는 인생의 필수 불가결한 구성 요소인 것이다. 자기 진실성의 이상은 외부 세계와는 전혀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자아를 찾아야만 하는 혹독하고 고독한 여정이 아니다. 타인/타자와의 지속적인 상호 관계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여 삶의 궤적을 보다 나은 의미의 지평으로 부지런히 끌어올리려는 합리적인 생활양식이다.


다음으로 불안을 일으키는 두 번째 근원은 ‘도구적 이성’이다. 경제적 이해타산의 최적화를 목표 성취의 유일한 수단으로 삼는 행태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성의 출현으로 전통적인 규제가 제거됨으로써 도구적 이성이 훨씬 더 빠르고 깊게 인간 사회의 전역으로 확산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양상은 도덕적 지평을 도외시하는 자기 진실성의 왜곡된 형태가 확산되는 양상과 맞물려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며, 더불어 현대의 기술 중심적 사고와 관료 중심적 체제가 그 악순환을 촉진한다. 이처럼 도구적 이성을 따르는 행태가 만연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적이거나 도덕적인 행위는 상당히 ‘위험한’ 선택이 되고 만다. 후자가 보다 유의미한 지평에 놓여 있는 선택인 줄 알면서도 효율 최대화 전략을 취하지 않으면 전자를 취하는 다른 이들에 의해 당장의 생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제적 압력은 현대인의 자기 폐쇄적 태도와 함께 자기 진실성 문화의 하강을 심화한다.


마지막 세 번째 근원은 앞선 두 개의 불안 요인인 개인주의의 변질과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서 파생되는 문제다. 오늘날의 우리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더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선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선택의 실천을 저해하는 사회적 강압에 짓눌려 있다. 저자는 이러한 원자주의적, 도구주의적 양태가 결과적으로 어떠한 의미 지평도 실제적으로 ‘공유’되기 어려운 환경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형성하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없어지는 파편화 현상”(143쪽)이 바로 그것이다. 불편하고 저급한 방향으로 가라앉는 사회를 개선하려면 충분한 다수의 시민들이 의미 있는 공공의 기획에 참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을 넘어서서 객관적으로 추구할 만한 공동체적 가치들에 관해 서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가 점점 파편화될수록 공공선의 지평을 공유하려는 시도, 즉 파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 시도 또한 점점 와해되고 만다는 점이다. 파편화가 그러한 시도의 약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각조각 부서지며 침몰을 거듭하는 현대 사회라면, 도대체 구할 수는 있는 걸까? 그런데 저자는 오늘날 진행되는 부정적 추세를 어쨌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전제하는 주장이란 현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역동성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무시하는, 편리하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역설한다. 근대성의 발현으로 한 개인이 보다 다채로운 자유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오늘날의 열린 사회는 “본질적으로 보다 저급스러운 방식과 보다 더 고급한 형식의 자유가 언제나 서로 경쟁적으로 다투는”(102쪽)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지금의 현대 사회가 원자주의-도구주의-파편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도 분명히 맞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는 저항적 논점과 부서진 자리를 어떻게든 메우려는 비판적 담론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투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기 진실성의 왜곡되고 저급화된 형태의 사나운 물살과 싸우는 동시에 보다 유의미한 삶의 지평으로 솟아오르기 위한 공동체적 투쟁. 이 책은 이러한 투쟁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에 관해선 사실 불충분하고 헐겁기까지 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고유한 도덕적 이상인 자기 진실성은 본질적으로 ‘희망적’이라는 진실을 탁월하게 논증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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