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에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불현듯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으로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미지의 방에 갇혀 있다. 이럴 수가, 전부 수학 관련 서적들뿐……! 벌써부터 미칠 것 같아 재빨리 문으로 다가가는데, 젠장, 문에 수학 문제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그리고 의문의 쪽지. 당신은 이 문제를 풀어야만 방을 나갈 수 있습니다… 큭큭… 이때 당신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한 권의 책을 뽑아 든다 ─ 『수학의 정석』.
수학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 우리는 수학 관련 서적, 그중에서도 가장 신뢰할 만한 서적을 찾는다. 그렇다면, 수학이 아닌 ‘불안’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는 무슨 책을 뽑아야 할까? 살면서 우리는 수학 문제보다 불안 문제를 훨씬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후자의 해결이 더 시급하고 중대할 테다(당신이 수학자가 아니라면). 그래서 여기 ‘불안의 정석’으로 손색이 없는 책이 있다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뭇 독자들은 이 책의 첫 장부터 불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흥미를 끌 만한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지위와 불안을 정의하고 그에 따른 명제를 제시하면서 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수학의 정석』도 아니고, 재미도 없거니와 내가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맞긴 할까? 이 책 또한 베개로 써야 마땅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이 책에는 아래와 같은 식과 표, 그래프가 빈번히 출몰한다.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69쪽, 151쪽, 248쪽
허나 식겁하지 말길 바란다. 이것들을 앞서 보여 준 까닭은, 이런 무시무시한 것들이 나오니 괜히 덤벼들지 말고 목베개 대용으로나 쓰자는 뜻이 아니라, 저자가 독자를 섬세하게 설득시키고자 이렇게 다방면으로 책을 구성했으니 조금 참을성 있게 읽어 보자는 뜻이다. 솔직히 몇십 페이지까지는 조금 낯설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또 한 가지 고무적인 부분은 저자가 바로 ‘알랭 드 보통’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글을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단연코 없다. 둘이 읽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작가이니 이 책에 대한 불안감은 한 꺼풀 벗겨 둬도 괜찮다.
『불안』은 현대인이 불안을 느끼는 원인 5가지 ─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 와 그에 맞서는 해법 5가지 ─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 로 구성된다.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현대인’이다. 이 책은 고대인용 혹은 중세인용도 아닌, 명백히 현대인용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보상이 주어지는 능력주의는 핏줄의 원천에 따라 그것들이 주어지는 고대인들에겐 다분히 어리둥절한 사상이다. 자본주의적 경제가 내포한 불확실성은 신이 창조한 완전하고 확실한 세상에 사는 중세인들에겐 굉장히 낯설고 불쾌한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바로 그것들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바로 지금의 당신!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8쪽)
그러나 오해는 말아 달라. 현대인과 그 이전 시대 사람들 사이에 고등 3학년용과 중학 1학년용처럼 우열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현대가 오기 전에 생을 마감한 인물들로부터 많은 해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은 이 작업에서 아주 적절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해법을 위한 지혜를 제공하는 이들을 근거 있게 존중하되, 무조건적으로 추앙하지 않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이 넘볼 수도 없는 위대한 철학자야, 당연히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지! 라든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라고 이 책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순종적이거나 찬양적인 어조를 최대한 배제하여 동등한 인간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주장을 제시한다. 이 방식은 독자와 현자들 사이의 인격적인 거리를 좁혀 주어 그 결과 당신은 이 책이 권하는 불안 문제의 풀이법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수학의 정석』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고 모든 수학 문제를 풀 수 없듯이, 『불안』을 읽는다고 당신의 모든 불안이 깔끔하게 0으로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저자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지점으로, 이 책은 불안을 말끔하게 제거할 수 있는 5가지 원칙을 설파하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현대인의 불안을 정돈된 방식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방안을 겸손하지만 자신에 찬 어조로 제안하는 인문교양서다. 말하자면 이 책은 불안의 정석 중 ‘기본편’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어려운 실력편은 어느 책일까?
바로 우리의 삶이다. 기본편에서 익힌 내용을 더 까다롭고 더 복잡다단한 현실 세계에 적용시키는 작업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얼얼한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눈을 떠 보니 현대라고 불리는 시대의 방이 아니던가. 이제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불안한 마음을 잘 풀어 문을 하나씩 열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단 몇 권의 책, 최악으론 단 한 권의 책만을 고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을 이 시대의 당신에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뛰어난 지침서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