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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근 Sep 27. 2021

낭비를 팝니다

제 목 : 낭비 사회를 넘어서

원 제 : Bon Pour La Casse

부 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지은이 : 세르주 라투슈

옮긴이 : 정기헌

출판사 : 민음사

출간일 : 2014년 4월 11일 (원서 2012년)

사 양 : 144쪽 / 140ⅹ210mm



꽤 오랫동안 썼던 스마트폰이 또 말썽을 일으킨다. 참다못해 서비스 센터를 방문했더니, 어떤 부품의 수명이 다했는데 워낙 오래된 기종이라 해당 부품의 재고가 없다고 한다. 이것을 수리할 바에야 차라리 새것을 사는 게 돈이 덜 든단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새 스마트폰을 사러 대리점을 찾아간다.


이것은 우리에게 꽤나 일상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이다. 현대 사회의 첨단 기술은 놀라운 발전을 이뤄 내고 있는데 그 부품의 수명은 왜 3년채 안 될까? 해당 부품만 수리한다면 전체를 바꿀 필요가 없는데도 왜 새것을 사는 행위가 헌것을 약간 고치는 행위보다 더 저렴할까? 신제품이 출시되는 주기가 기존 제품의 수명이 다하는 시기와 유사한 것 같은데, 설마 의도적이기라도 할까?


놀랍게도 우리는 제품의 수명이 의도적으로 정해져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을 제품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꽤나 정확히 감지하고 있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는 바로 그 점, 이른바 ‘계획적 진부화’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목적으로 쓰인 책이다. 이 책의 부제에서 그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낭비 사회를 넘어서』의 저자 세르주 라투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로, 우리가 “성장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 성장이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는 사회”(16쪽)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것은 인류의 위대한 가치들 ─ 사랑, 용기, 관용 등 ─ 을 증진시키는 성장이 아니라 오직 자본의 성장을 위한 성장을 의미한다. 우리는 공론장을 만들기보다 제품을 만드는 데 훨씬 더 뛰어나고, 새로 나온 시집을 사기보다는 새로 나온 휴대폰을 사는 데 훨씬 더 기민하다. 나날이 인격을 키우기보다는 날마다 자본을 불려 감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낭비하고 있다. 우리는 “성장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환자가 되(20쪽) 가고 있는 것이다.


책은 성장 사회가 우리를 낭비시키는 세 가지 주요 요소로 광고, 소비 금융, 계획적 진부화를 제시한다. “광고는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소비 금융은 그 수단을 제공해 주며, 계획적 진부화는 소비자의 필요를 갱신”(23쪽)한다. 현대 사회에서 광고는 모든 시간·장소를 장악하여 무엇이든 소비하도록 명령한다. 원했던 것을 더욱 원하게 만들고, 심지어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도 그 욕망의 가능성을 주입시켜 원하도록 만든다. 소비 금융은 욕망의 대상을 즉시 구입할 수 있도록 자본을 제공한다. 이러한 자본은 결국 미래에서 빌려 온 부채이므로 장기적으로 현명한 소비를 방해한다.


저자는 “계획적 진부화야말로 성장 사회를 이끌어 가는 소비주의의 절대적 무기”(31쪽)라고 역설한다. 저자가 인용한 자일스 슬레이드의 정의를 따르면,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공산품의 수명을 단축시켜 새로운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기술을 가리키는 포괄적 개념”(37쪽)이다. 우리는 광고를 (아주 힘들겠지만) 거부할 수 있고 대출을 받지 않을 수 있어도, 제품에 내재되어 있는 의도적인 결함을 직접 제거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우리에게 낭비를 팔고 있는 것이다. 생산된 제품은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곧이어 폐기처분장으로 가야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낭비를 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구매를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제품들의 죽음 덕분에 성장과 소비의 사회가 목숨을 이어 가는 것”(39쪽)이다.


책은 계획적 진부화에 관한 윤리의 문제로 나아가는데, 저자는 다른 이의 말을 빌려 “명백하게 비정직한 방식에 기초한 인위적인 수요 창출은 분명히 윤리에 어긋나는 일”(81쪽)이라고 단언한다. 혹자는 제품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기술적 진보의 혜택을 그만큼 누릴 수 없다며 계획적 진부화를 옹호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진보는 정말로 이러한 성격의 것인가? 또 다른 혹자는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이뤄지지 않으면 경제가 성장을 멈추고, 노동자가 해고되고, 결국 대부분이 굶게 될 것이라고 비관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한한 생산·소비에 의존하는 사회에서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소비주의는 (…) 미덕, 원칙, 이상의 상실을 부추겼다. 정직성, 도덕성, 결백, 공정성, 체면, 진지함, 절제, 정중함 (…) 등 이 모든 것은 이제 가치의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84쪽)


저자는 인간의 존엄마저도 진부화되고 낭비적인 요소로 간주되는 지금의 세태를 꼬집는다. 현대 사회는 개인을 유일하고 고유한 생명으로 보기보다는 거대한 사회 조직의 부속품으로 여긴다. 끝도 없이 성장해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수명이 다하거나 결함이 발견된 개인은 고장 난 기계처럼 버려지며 곧 새것으로 교체되고 만다. 그러나 새것도 곧 진부해지고, 인간을 낭비하는 악순환은 반복된다.


계획적 진부화는 또한 “자연 자원의 낭비와 쓰레기의 범람이라는 중대한 생태적 문제를 야기”(97쪽)한다. 인간의 끝없는 경제적 성장 때문에 자원은 아주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데, 막대한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은 고스란히 생태계로 전가되고 있다. 이것은 곧 미래의 진부화, 미래의 낭비이다. 계획적 진부화는 미래 세대의 생태 환경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이고, 그들의 미래를 오기도 전에 구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성장 사회의 기치를 유지하는 동시에 생태 친화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낭비가 낭비 아닌 사회, 낭비가 곧 필수가 되어 버린 ‘낭비사회’에 다름 아니다. 이 책은 낭비사회를 넘어서, 끝없는 성장을 위한 성장에서 이탈한 ‘탈성장’을 제안한다. 이것은 더 이상 성장하지 말고 멈추자는 뜻이 아니다.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성장을 상상하고 구상하자는 것이다. 인류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가꿔 온 가치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로. 어떻게 그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낭비 사회를 넘어서』는 우리가 인류의 진정한 성장을 고민하는 데 진부함을 느끼지 않도록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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