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아버지학교
지은이 : 이정록
출판사 : 열림원
출간일 : 2013년 5월 13일
사 양 : 128쪽 / 135ⅹ210mm
아버지는 이가 자꾸만 시리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저 또한 냉수를 마실 때 이가 시린다고 흘기듯 대답했다. 그리고는 양치에 소홀하셔서 그런 것이니 이를 좀 더 깨끗이 닦으셔야 한다고 핀잔을 드렸다.
며칠 후 아버지는 왼쪽 윗어금니가 시린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치과에 들르셔서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하나 마나 한 대답을 드렸다. 아버지는 주말에 집 앞 치과에 가겠노라고 나에게 다짐하셨다. 그리고 주말이 되어 아버지는 다른 일에 바쁘셨고 나는 묻지 않았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아버지는 치과에 다녀오셨다. 왼쪽 윗어금니의 손상이 꽤 진행되어 발치 이외에는 치료가 불가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입을 크게 벌리시고는 나에게 썩은 이를 보여 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충치와 게으름에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오는 주말에 치과에 다시 들르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주말이 되어 아버지는 다른 일에 바쁘셨고 나는 또 묻지 않고 말았다.
어느 금요일 저녁,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충치가 여느 때보다 더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입을 벌리셨고, 나는 검게 그을려 버린 충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내일은 꼭 집 앞 치과에 가셔서 썩은 이를 뽑으시라고 당부드렸다. 아버지는 진통제 한 알을 드셨지만 밤새 고통이 가시지 않은 듯 화장실을 자주 왕래하셨다.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아버지는 꽤 이른 아침에 치과를 다녀오신 것 같았다. 몇 겹 포개진 두루마리 휴지 위에 아버지의 충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다. 아버지의 어금니들은 크고 굳건했다. 아버지 속에 이런 단단한 것들이 박혀 있었음에 나는 마음이 시렸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젠 견디지 못해 빠져 버렸음에 마음이 무너졌다. 나는 그제야 아버지께서 입 안에 숨겨 놓으셨던 아버지로서의 인생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딱딱하고 질긴 삶의 시름을 이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어 드셨음을, 그리고 시름이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이다 충치가 되어 버렸음을.
아버지는 충치가 빠져나간 자리를 이따금씩 확인해 보셨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씁쓸한 숨을 들이마셨다. 이가 사라진 자리만큼 이 세상 속 당신의 자리도 사라진다고 생각하셨던 걸까. 아버지는 헛헛해진 입 안을 혀로 훑으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인생은 이가 하나씩 자라기 시작했다가 결국엔 이가 하나씩 빠져나가는 것이로구나.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직접 겪고 나니 이가 빠져나간 자리처럼 마음이 허전허다.”
그날 밤, 나는 시집 『아버지학교』를 꺼내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정록 시인이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우고 느낀 것들을 진솔하게 담은 책, 56세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를 위해 56편의 시를 꾹꾹 눌러 담은 책,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아버지학교』의 불량학생들’(7쪽)이라고 앞장서 고백해 버리는 책. 그의 시는 나에게 작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은, 하물며 썩어 뽑아 버려야만 했던 충치마저도 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또 그의 시는 나에게 낮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모든 자식은 ‘아버지의 마음 한쪽을 상속받았다’(「면도기」 中)는 것을. 그래서 모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시로 적힌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이 시집을 아버지 몰래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제목에 적힌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킬까 봐 읽지 않을 때면 책을 뒤집어 놓았다.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삶 한쪽이 시리고 썩어 갈 때에도 무심했던 나 자신이, 아버지를 노래한 시를 읽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아니, 내 마음 한쪽이 아버지에 대한 부족한 사랑으로 인해 충치처럼 썩어 가고 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웠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삶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는, 아직도 이가 덜 자란 자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