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지은이 : 이해인
출판사 : 마음산책
출간일 : 2014년 11월 25일
사 양 : 272쪽 / 135ⅹ225mm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를 써 본 적 있으신가요?
군 복무를 약 3개월 남긴 어느 날이었습니다. 다시금 어머니가 그리워서 집으로 책 한 권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편지도 하나 쓰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그때 문득 조그만 생각이 스쳤습니다. 시를 한 편 써야겠다.
어머니는 저에게 책을 선물할 때면 항상 표지 다음 장에 소박한 글 ─ 제가 읽은 최초의 시가 아닐까 합니다 ─ 을 적어 주셨습니다. 다행히 조금 철이 들어 어머니께 책을 선물할 때면 마찬가지로 글을 적어 드리곤 했습니다. 그 당시 시를 쓰겠다 결심한 이유는 아마도 책에 직접 글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책이 시집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인 예수는 잘 모르셨지만, 그가 일생을 바쳤던 소중한 가치들은 일찍이 알고 계셨습니다. 성당은 10년이 조금 넘게 다니셨는데, 천주교의 교리를 공부하시면서 어머니는 이해인 수녀님을 알게 되셨고, 이내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이해인 수녀님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으셨습니다. 제가 보내드린 책은 이해인 수녀님의 당시 최신작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이하 『동백꽃』)이었습니다. 저는 며칠 후 시를 담은 편지도 보내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제대했고, 복무기간 동안 읽었던 책들과 함께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몇 군데 중 한 곳에 『동백꽃』이 꽂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움의 감정에 이끌리듯 읽게 되었습니다.
동백꽃은 한겨울에 눈 속에서 붉은 꽃을 피우고, 질 때는 조금도 시듦 없이 꽃송이 그대로 떨어져 내립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봄의 민들레처럼 작고 여린 모습의 그 수련생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인내의 소금을 먹고 하늘을 바라보는 한 송이 동백꽃’(10쪽)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책은 수녀님이 자신의 삶을 참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꽃에 자신의 삶을 견주어 성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백꽃』을 읽으면 문득 동백꽃 향기가 행과 행 사이에 묻어나는 듯합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삶의 터전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들을 새롭게 사랑합니다. 매일 떠오르는 아침 해, 매일 같은 시간에 치는 수도원 종소리, 오늘도 어김없이 지저귀는 새들도 수녀님은 처음 찾아온 사랑으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수녀님의 마음속에서 행복과 버무려져 ‘시’가 됩니다. 『동백꽃』은 시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행복이고 사랑을 전하는 한결같이 아름다운 방식임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은 두 편의 시를 쓸 수 있어 행복했지. 앞으로도 종종 시를 쓸 수 있는 행복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되겠지. (256쪽)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병든 육체의 고통 따위는 사랑이 주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그러나 수녀님의 시는 그것들마저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동백꽃』 속 지인의 죽음이나 암 투병 중인 수녀님 스스로의 고통을 담은 시를 읽으면, 감추려 들거나 어떻게든 희망으로 바꾸려 안간힘 쓰지 않습니다. 정말 슬프면 슬픈 대로 울고, 오늘은 버티기 힘들다면 무너지기도 합니다. 또 수녀님의 시는 모두가 말하고 쓸 수 있는 평어로 쓰여 있어서 오히려 더 강하게 읽는이의 감정을 두드립니다.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것마저 진실로 받아들이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심(詩心)은 우리 마음속 좁다란 사랑이 더 넓게 사랑할 수 있도록 독려합니다.
『동백꽃』에는 이해인 수녀님이 어머니에게 쓴 몇 편의 시도 실려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직접적인 그리움을 표현한 시는 몇 편이지만, 수녀님은 자신의 영혼과 시의 근원이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시를 쓰는 마음이 모두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다면, 사랑하기에 시를 쓰는 것은 결국 ‘어머니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동백꽃』은 어머니의 존재가 삶과 사랑의 근원임을 알고 있지만, 정작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표현 한 마디가 더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나아가 『동백꽃』은 더 넓은 의미의 어머니 ─ 길가의 작은 꽃, 오랜 친구, 내 주변의 이웃 등 ─ 을 사랑하는 데 박하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도록 격려해 주는, 어머니 같은 책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제 어머니께서 끄트머리를 접어 놓으신 시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 수고가 많았다고 / 제가 저를 조금만 / 다독여주어도 괜찮겠지요? //
살아갈수록 / 나이 들수록 / 제가 드릴 말씀은 / 왜 이리 / 가난한가요?
- 「끝기도」 中 -
저는 어머니에게도 따뜻한 한 마디의 위로가 필요했음을, 제가 어머니께 ‘어머니의 삶은 동백꽃입니다’ 같은 한 송이의 사랑조차 건네지 못했음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책 표지 다음 장에 써 놓으신 두 마디 덕분에 저의 시가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음을 느낄 수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작은아들에게 선물 받았습니다. 행복합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를 써 보는 건 어떨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언제나 ‘시’였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