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은 모래와 같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꽉 쥐어 본다 한들, 손을 뒤집으면 모든 틈 사이로 허망하게 빠져나간다. 누군가의 거짓과 또 다른 누군가의 거짓을 한 손에 모아 본들, 단지 더 큰 거짓 덩어리가 될 뿐이다. 거짓 위에 거짓을 쌓아 더 높은 곳에 닿으려 한들, 그것들은 바닥으로 흘러내려서 오히려 감당해야 하는 거짓의 영역만 더 넓어질 뿐이다.
어리석게도 세상엔 모래를 믿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는 한 톨의 모래도 흘리지 않고 붙잡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들에 비해 덜 떨어지고, 돈 없고, 그래서 하찮은 사람들이 그들의 손을 아무리 뒤집으려 한들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들은 손에 쥐고 있는 서로의 모래를 모으고, 비비고, 섞고, 꾹꾹 눌러 뭉치면 거짓과는 전혀 다른 단단한 물질, 그러니까 사실 혹은 진실을 만들 수 있다고 자만한다.
일본 사회파 범죄소설의 시원(始原)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표작 『모래그릇』은 바로 이러한 모래 신봉자들의 본질과 최후를 담고 있다. 소설은 도쿄 부근 조차장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면을 가격당한 시체가 발견되면서, 이마니시 에이타로라는 중년의 형사를 중심으로 범죄자를 쫓기 시작한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모래그릇의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고, 거짓은 진실 앞에서 부질없이 깨어질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그리고 있다. 모래를 믿는 자들의 어긋난 욕망들 그리고 그 사이에 필연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의 무게를 견디기엔 모래로 빚어진 삶의 그릇은 너무나 조악하고 연약하다.
소설 속 범죄자들은 모래를 믿지 않는 평범한 이들에겐 단지 잘못된 욕망일 뿐인 것들을 삶의 진정한 이상이라 여긴 채, 거짓의 탑을 쌓아서 그곳에 닿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정된 유일한 결론은 파멸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실패했다고 말하겠지만, 실패는 그들을 위한 단어가 아니다. 실패는 올바른 가치를 희구하는 자들을 위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패배했다고 생각할 테지만, 패배 또한 그들을 위한 단어가 아니다. 패배는 정당한 도리를 지킬 줄 아는 자들을 위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세이초는 본질적인 물음 ─ 그의 소설을 ‘사회파’ 범죄소설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에 주목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모래를 믿게 만들었는가? 『모래그릇』의 배경은 1960년경의 일본으로, 작가는 당시 전후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노출된 자가 범죄에 빠져드는 궤적을 그려 냄으로써 사회 구조가 그 책임을 피해 갈 수 없도록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결국 소설은 사회 구성원들을 올바른 사고방식으로 유도하지 못하고 그러한 범죄가 일어나게끔 방치한 사회 구조를 근원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모래적 범죄의 탄생과 파멸이 특정 한 시대의 막간 에피소드로만 쓰인 적은, 없다.
에이타로 형사의 끈질긴 추적 끝에 범죄자들이 체포되면서 소설은 끝나지만, 현실의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모래를 믿는 자들을 처벌한다 한들, 모래에 대한 그릇된 믿음 자체를 없애지 못한다면 모래그릇은 누군가의 삶 속에서 다시금 빚어질 것이다. 그것의 깨진 파편들이 여기저기 매섭게 박힌 채 우리 사회는 무고한 고통으로 신음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 모래사회의 운명을 누가 뒤바꿔 나갈 수 있는가?
이는 ‘모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몫이다. 알량한 거짓으로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실패를 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치졸한 거짓으로 올라설 바에야 차라리 패배할 각오가 되어 있는 바로 그 사람들. 범죄 사건은 범죄의 가치를 결코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해결되듯이, 거짓의 탑을 허물어뜨리는 일은 오직 거짓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일은 험난하고 지난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모래를 믿지 않는 그 믿음은 모래 속의 빛 알갱이처럼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