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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근 Sep 03. 2021

웬만하지가 않아서

제 목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지은이 : 이기호

그린이 : 박선경

출판사 : 마음산책

출간일 : 2016년 2월 25일

사 양 : 252쪽 / 128ⅹ185mm



지상파의 한 다큐 프로에서 노량진을 촬영하러 갔다. 고시생 공시생 취준생, 여하튼 무언가를 죽기 살기로 준비하는 청춘들이 빽빽이 박혀 있는 바로 그곳. 피디가 다음으로 촬영할 이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여느 직장인처럼 분주히 아침 버스에 올라 노량진 학원으로 출근했다. 그리고는 오전 내내 한 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다. 그녀는 아주 매서운 눈매로 문제를 풀고 강사의 말을 받아 적었다. 몇 시간을 꼬박 집중하다 보면 지칠 법도 한데, 그녀의 점심은 2,800원짜리 컵밥 하나였다. 아니, 오늘은 특별히 촬영하는 날이니 스팸을 하나 더 얹는 사치를 부려 3,200원짜리로.


아직 놀랄 것도 없다. 오후에도 강의가 또 이어지니까! 심지어 아침부터 들어앉아 있던 그 자리 그대로다. 그녀는 오전과 똑같이 문제 풀고 필기하기를 반복했다. 오호 통재라, 선생님의 길이 이다지도 험난했단 말인가. 그렇게 몇 시간의 강의가 끝나니 슬슬 해가 저물어 간다. 그럼 이제라도 좀 쉬어 볼, 리가 없다. 그녀는 곧장 ─ 저녁 식사 장면은 방송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안 먹은 걸지도 ─ 독서실로 향했다. 피디가 언제까지 공부하냐고 묻자 그녀는 독서실이 문 닫을 때까지 한다고 대답했다.


세상에, 진짜로 문 닫을 때까지 공부했다! 도무지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거짓말 같지만, 사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독서실에서 집, 그러니까 노량진 가까운 곳의 몇 평 남짓한 원룸으로 돌아와서는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의 뇌와 심장은 범인의 그것과는 소재부터 다른 게 분명하다. 혹시 노량진 어느 으슥한 곳에서 인내에 특화된 것들을 불법 수술하는 건 아닐까? 이런 의혹이 그럴듯할 만큼 그녀는 무쇠인간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그런데 이상했다. 인강을 틀어 놓고도 그녀가 TV를 안 끄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강사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텐데, 도대체 왜? 피디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주변으로 들려야 덜 무섭고 덜 외로우니까요.” …… 어라? 우리가 하루 동안 봐 온 그녀는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식사가 부실하더라도, 강의로 시작해서 강의로 끝나더라도 끄떡없던 그녀였는데. 그냥 잠깐의 오류일 뿐이겠지.


아니다. 이상한 점이, 이상하다 못해 정말로 기가 찰 노릇이 하나 더 있다. 노량진에서의 하루 동안 그녀가 진정한 대화를 나눈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던가? 버스 기사님과의 짧은 인사 또는 컵밥집에서의 주문 같은 것 말고, 온전히 서로의 시간을 내어 웃음과 울음을 주고받는, 사람 대 사람의 그런 진짜 대화. 안타깝게도 한 번도 없었다. 아, 정말 다행히도 오늘 하루는 달랐다. 피디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쫓아다니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 줬으니까. 그녀는 방송 분량을 다 찍은 피디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식적이라는 것을 알지만요. 그래도 저랑 얘기 나눠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 그녀의 말에 코끝이 찡해지지 않을 사람이 혹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무쇠인간일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보석이 반짝이는 장신구를 차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청춘. 그러나 가족 또는 친구와의 고작해야 몇 분의 전화 통화 이외에는 스스로를 노량진에 가둬 놔야만 하는 이 시대의 씁쓸한 청춘. 웬만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버티고, 웃고, 무언가를 해낼 텐데. 어디 웬만큼 웬만해야지, 이 세상이 참으로 ‘웬만하지가 않아서’ 그녀는 끝내 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과연 노량진의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취직이 안 돼 눈높이를 낮춰도 여전히 취직이 안 되는 청년, 몇 년째 경찰공무원 시험을 낙방해 어버이날이면 치가 떨리는 서른 중반의 형, 돈을 쥐어짜서라도 홀로 키운 아들을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고 싶지만 추첨에서 기분 좋게 떨어지는 아빠, 부모님이 물려준 빚을 갚으려고 죽을 똥 말 똥 일했어도 희망이 없자 번개탄을 준비하는 트럭 기사, 팍팍한 삶을 사는 자식들이 제사라도 하나 덜 지내라고 먼저 간 남편의 기일이랑 같은 날 떠나려는 할머니…….


이기호 작가의 소설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에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옆에서 같이 숨 쉬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이야기다. 아니, 고백하건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다. 가엽다! 우리네 삶은 가엽다. 웬만해선 좀 웬만하게 살면 얼마나 좋으련만, 웬만하지 않더라도 지지고 볶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니 가엽지 않으면 무엇이겠는가. 오호 또 통재라! 그러나 인간이 70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인생이 웬만하지 않았던 적은 사실 없었다. 그때의 웬만하지 않음과 지금의 웬만하지 않음이 다만 다를 뿐.


그렇다, 이 책에는 그때가 아닌 지금의 웬만하지 않음이 담겨 있다. 또 고백하건대 이것이 이기호 작가에게 고마운 첫 번째 이유다.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사랑을 하는 잘생긴 로미오와 어여쁜 줄리엣 말고, 돈과 권력을 따먹기 위해 피 터지게 싸우는 지체 높으신 회장님과 그 아들들도 말고, 지금 여기를 어떻게든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뭔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을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그것이 실로 어려운 일이고 대단한 일이다.


이기호 작가에게 고마운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가여운 삶에 있는 생기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프고 절망적이고 눈물밖에 흘릴 게 없기보다는 또 한편으로 기쁘고 희망적이고 작거나 큰 행복이 있고 호탕하게 웃을 줄 안다는 말이다. 세상이 웬만하지 않다고 해서, 어디 우리가 죽 치고 앉아 울고만 있을 사람들인가? 알고 보면 우리도 웬만하지가 않다! 책 표지의 제목 옆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웃음과 눈물의 절묘함.’ 물론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기호 작가는 우리의 삶이란 웃음과 눈물이 절묘하게 비벼진 소설 같은 것임을 일깨워 준다. 정말 고맙다.


사실, 세 번째 이유가 가장 고마운 것이다. 그게 뭐냐면 ─ 짧다! 40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단편이 되게 짧다. 아무리 길어 봤자 4장인데, 글자 크기도 돋보기안경이 필요 없을 만큼 넉넉하다. 심지어 중간중간 이쁘게 채색된 그림들도 있다. 책 읽기에도 웬만하지 않은 세상인데, 이 소설집은 들고 다니면서 끊어 읽기에 딱이다. 재미도 없는데 길기까지 한 이 글도 여기까지 참고 읽어 온 인내력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쯤이야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글보다 훨씬 재밌고, 웃기고, 눈물 난다. 아, 너무 당연한 얘기인가. 어쨌든 요지는 이 책 꼭 한번 읽어 보시라는 말이다.


웬만하지 않은 세상인지라 각자 먹고사는 일에 바쁜 것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웬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아 주고 서로의 등을 토닥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내미는 손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출입문을 밀치고 뛰어나갔다네.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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