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비가 왔다. 우산이 없어서 조금 맞고 축축한 교복으로 등원했더니 그를 마침 복도에서 마주쳤다. "많이 젖었구나"라고 안쓰럽게 말하던 그는 그의 손을 내 목에서 어깨로 연결되는 지점에 얹어놓았다. 아무런 의미 없이 한 행동 었지만 그의 손의 감촉이 너무 생경해서 한동안 얼어있었다. 그는 그날의 행동을 시뮬레이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으면 하는 기대를 버리기도 어려웠다.
그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는데 특히 언니들에게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고등학생 수업특성상 늦게 끝나면 그의 차로 언니오빠들을 데려다주었다. 그런 게 부러웠다. 그 언니들 중에는 나보다 이쁜 언니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언니들이 선생님에게 보내는 존경의 눈빛을 볼 때마다 질투의 감정이 앞섰다. 그와 언니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잠깐이나마 같이 있는 게 싫었다. 혼자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한 명씩 데려다주다가 누군가와는 둘이 남게 되는 순간이 있을 텐데 그 지점이 내가 아쉬워하는 때였다. 그래서 빨리 고등학생이 되고 싶었다. 그럼 그를 독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은 담배를 피우고 내려오는 그를 학원입구에서 마주쳤는데 그의 '쉽지 않네요'라는 말이 전부터 이야기해 왔던 '담배 끊으라는 내 말'에 대한 응답인 거 같아서 그것조차도 심장이 쿵 했다. 그의 모든 말이 내게 충격이었다. 그건 그리고 긴 파장을 일으켰다. 그런 파장은 한동안이나 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깊은 여운이 남곤 했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서 나를 규정했다. 그에게 자랑스럽고 싶어서 한 자기 파괴적인 공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성적을 지속적으로 올려주었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고 그를 온전히 나만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회는 왔다. 선배들의 시험기간과 겹쳐, 늦게까지 학원에서 야간자습을 마치고 나오는데 선생님이 "제 차 타고 가요"라고 했다. 나는 그가 좋았다. 그의 차를 타며 맡는 밤공기도, 결국엔 둘만 남게 된 이 상황도. 그를 만나면 쉴 새 없이 종알거리던 내 입술은 허공을 맴돌았다. 막상 같은 공간에 둘에 있게 되자 정적이 찾아왔다. 그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3분가량의 정적이었을까, 나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