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환전은 공항에서 바로 하는 편인데 얼마 되지 않는 수수료가 계산해 보니 15000원 정도가 됐다. 탑승해서 자리에 앉아있었더니 가운데 사람이 앉은 다음 "감사합니다." 했다. 저가항공은 펜도 제공해주지 않아서 마침 가방에 있던 펜을 옆자리 사람과 공유했다. 인사성이 밝기 때문이다.
내려서 어떤 직원은 캐리어가 없이 백팩만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묵느냐 해서 3일이라 했다. 입국심사직원은 호텔을 묻더니 '아'하고 심사를 해주었다. 전에는 포켓와이파이만 쓰다가 이심으로 해봤는데 일본 도착해서 안되길래 식겁했다. 결국 큐알코드로 되긴 했는데, 매끄럽게 되지 않으면 사서 스트레스를 받는 게 내 특성이다. 하지만 해결되고 안심하며 버스를 탔다.
버스를 한 시간가량 타니 멀미할 것 같았다. 그럴 무렵 내렸다. 시부야는 올 때마다 사람이 많았다. 수많은 인파 속에 섞이며 '나는 자유다'란 걸 다시금 상기했다. 뭐든지 해당 장소에 도착했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그다음부턴 시련의 연속이다. 왜 사서 고생하냐라고 여행을 비판하는 자는 말하지만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도착해서는 일단 숙소에 가서 짐을 풀었다. 일 년 전에 가본 적이 있는 숙소라서 익숙했다. 숙소가 정해져 있단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때와 비교해서 알게 됐다. 그땐 잘 곳이 없단 게 얼마나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숙소가 해결되자 나머지 여행은 거저 얻은 것 같았었다. 하지만 여성전용이 없어 공용을 써야 했는데 그래도 그땐 조식제공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조식제공이었다.
식사를 할까 생각했는데 짐을 풀고 나니 9시가 되었다. 그래서 가고 싶었던 bar bridge에 갔다. 저번 여행엔 어떻게 해서도 구글맵으로 안 찾아지고 주변만 뱅뱅 돌아서 못 갔었는데 이번엔 바로 나와서 그것조차 명쾌했다. 흔히 지하나 1층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10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려고 보니 이미 2명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로 누가 나를 건드렸는데, 뒤돌아보니 중년의 사내가 sorry라고 했다. 그가 그날 음악을 트는 디제이였다. 레코드 2박스와 별도의 음악재생기기까지 합해져 엄청 무거운 것 같았다. 그걸 옮기면서 가게 표지판을 쓰러뜨리는 바람에 그는 그걸 바로잡았다.
10층으로 올라갔더니 막 오픈을 했는지 사람이 없었다. 한 커플이 탔는데 남자를 처음 보고 한국인인 줄 알았는데 일본인이었다. 옷 입는 게 한국의 DJ와 비슷했다. 하늘색 맨투맨에 양말을 깔맞춤 한 복장이었다. 캡모자를 썼다. 여자는 라운드티에 셔츠를 걸쳤다. 그 둘은 들어서자마자 디제이 바로 옆자리에 자리를 맡았는데, 처음 온 게 아닌 듯했다. 구조는 특이했다. 보통 디제이가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형태로 한국은 만들어져 있는데, 여긴 직원이 가운데에 있고 디제이 부스도 그 가운데에 있어 사람들을 바라보는 형국이었다. 디제이 앞에 앉기엔 부담스러워서 직원이 바라보는 뒤쪽(내 뒤에는 화장실이 있었다)으로 자리를 잡았다.
엘베를 같이 탄 사람은 디제이와 친분이 있는지 대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다. 입구에 도착해서 나는 여행지갑으로 쓰기로 한 카드지갑이 엔화와 동전으로 가득 차서 한참을 정리하고 있다가 커플이 먼저 입장하고 혼자인 일본인을 먼저 계산하라고 했다. "You First"라고 했더니 내가 입장할 때 그는 나를 응시했다. 말을 걸 수도 있었지만 섣불리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앉은자리는 앉고 보니 그와 대각선으로 볼 수 있는 자리였는데, 내가 안 볼 땐 그가 나를 보고 내가 볼 땐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일본인은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 그게 좋게 느껴졌다.
핸드폰 충전이 필요해서 말하니 인포에서 해준다고 했다. 충전하는 동안 나는 디제이부스를 바라보았다. 음파가 움직이는 걸 보면 언제 음악을 믹스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초보 믹스와는 달랐는데 곡을 의도적으로 빠르게 재생해 부드럽게 연결시켰다. 그리고 USB와 레코드를 둘 다 이용했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금요일 저녁인데 장소에 따라 이렇게나 차이가 날 수 있다니 감탄했다.
외국인은 계속해서 들어왔다. 내 옆자리의 스킨헤드는 담배를 폈다. 냄새를 맡으니 피고 싶어졌다. 한국에선 어차피 남 눈치 보느라 피지 못하는데 건강 때문도 있지만, 한 개비 만은 괜찮을 것 같았다. "May I borrow your cigarette?" 그랬더니 그는 흔쾌히 주었다. 그의 담배는 말보로였다. 피자마자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지럼증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여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나를 모르고 그들은 나에게 친절하다. 그 사실만으로도 해방감이 느껴져서 즐겁게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믹싱은 모든 부분이 좋은 건 아니라서 음악은 때때로 레게풍으로 리드미컬하게 이어지곤 했다. 그랬더니 옆자리의 스킨헤드는 "Music is not good"이라고 했다. 그도 하우스를 좋아한다고 했다.
"You are going to stay here for the rest of the day?"
라고 했더니 그는 "I don't know"라고 했다.
"What do you do on your day off?"라고 묻자 그는 "Well.. Drink."라고 했다.
"How long stay here"라고 물었더니 그는 13년째 일본에 있다고 했다.
타인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담배를 얻어 피운 것 때문인지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What are you doing tomorrow"라고 묻자 그는 "Maybe I will stay here"라고 했다.
"Are you good at Japanese?" 물었더니 그는 직원들이 해서 본인은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내게 술을 사줄까 물었다. 이전에 논알코올모히또를 시켜놓은 상태였다. 그는 샷잔에 테킬라를 직원에게 붓게끔 시켜 모두와 원샷했다. 사장은 매상이 올라 기분 좋은 듯 Cheers 했다. 그는 내게도 마시게끔 하고 싶었지만 거절하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의 핸드폰 액정에는 아이가 있었다. 직업이 뭔지도 묻지 않았다. 그런 거 물어봤자 나중엔 기억에도 안 남을 것들이니까. 그가 진실을 말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처음에 담배를 주면서 핸드폰 슬롯머신을 공허히 하고 있길래 게임을 좋아하냐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취미도 없고 전형적인 공허한 현대인이 군 생각했다.
대화 소재가 떨어져 갈 무렵 그의 옆자리엔 다른 여자가 앉았고 그녀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잠깐 아래층에 다녀온다고 하니 알았다고 했다. 아래층은 힙합이라고 들었는데 들어가니 전혀 흥이 나지 않고 오히려 답답함이 가중되었다. 5분 만에 나오자 한 남자가 들어오며 나를 봤다.
도망치듯 빠져나와 다시 돌아와서 아까 스킨헤드가 사준 2번째 잔을 먹은 다음 다른 곳에 가기로 했다. 이미 시간은 2시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모처럼의 휴일을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Mitsuki라는 저번여행에서 가지 못했던 장소였다. 길을 조금 헤맸지만 그나마 수월하게 찾을 수 있었다.
문지기는 2000엔과 여권을 요구했다. 들어갔더니 이태원의 케이크샵과 비슷했다. 좁은 공간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이따금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무가 나오면 내 얼굴을 알아보지 않아서 더 자연스러워질 수 있었다. 어차피 그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모를 테지만 더 익명성이 되고 싶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 보여주고 싶지 않을 만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음악은 고조되어 갔고 나는 점점 댄스플로어 앞으로 이동했다.
아무도 "Where are you from?"이나 신상 같은 걸 묻지 않아서 좋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지만 옆의 사람을 건들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였다. 간혹 너드찐따같은 애들이 뒤돌아봤지만 그때마다 철저히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다 벽 쪽에 자리를 잡고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옆의 사람이 계속 팔을 부딪혔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내가 술 한잔 살까?라고 그는 말했다. 영어를 못하는 척하며 손을 엑스로 그었다. 그랬더니 파파고로 영어를 일어로 번역해서 물었다. 내가 일본인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오래 서있던 탓인지 발이 아팠다. 대화 조금 하는 건 괜찮을 거 같기도 했다.
바에 가서 맥주 두 잔을 시켰다. 거의 3년 동안의 금주가 깨진 순간이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왔고 게이머라고 했다. 도쿄엔 1달 전에 왔다고 했다. "What did you do in Tokyo?"라고 물었더니 별거 한건 없다고 했다. 한국인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시발'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인들이 겜에서 하는 말을 배웠다고 했다. “Actually, it's hard to treat foreigners but I like because you make me comfortable "이라고 했더니 그는 고맙다고 했다. 그가 내게 "beautiful"이라고 했다.
"I can't hear the music because I'm talking to you"
그는 "Do you want to stay here?"라고 물었다.
마시던 맥주를 먹고 나가자고 했다.
밖의 날씨는 서늘했다. 일본에 왜 왔냐고 묻길래 "To get rid of my thoughts"라고 말했더니 그도 그렇다고 했다. 시끄러운 장소/조용한 장소 둘 중 어느 걸 원하냐고 해서 조용한 델 가자고 했다.
길을 갈팡질팡 하더니 "Actually I don't know shibuya"라고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가 찾은 곳은 허름한 바였다. 원형계단으로 올라가자 미국식 펍이 나타났다.
그는 가자마자 직원과 "이랏샤이마세"라고 인사를 하고는 칼 꼽기 게임과 악어게임을 가져왔다. 칼꼽기는 어이없게 졌다. 그러자 샷을 시켰다. 샷입가에는 설탕이 묻어 있었고 라임 한 조각이 올라가 있었다. 그는 무릎을 내 무릎에 닿게 했다. 그는 "You cute"라고 했다. 그 말이 외국인이 한국인을 꼬실 때 하는 말인걸 알고 있었다. 플러팅 하는 거야? 물었더니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In general, the were cases where foreigners in Korea thought of Koreans easily. I'm not saying that you are."이라고 말하자 그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한 오목 게임까지 그는 연이어 패배했다. 그는 옆자리에 온 외국인 무리에게 "이거 누가 진 거 같아?"라고 묻자 그들은 이구동성이로 "You"라고 말했다. 그는 어느새 취한 것 같아 보였다. "Let's go"라고 했더니 그는 "Where?"라고 물었다. "Go home"이라고 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계산이 6만 엔이 나와서 "I will pay half"라고 하며 돈을 냈다. 그는 순순히 받았다. 가게 밖으로 나오고 난 후 그를 되돌아보지 않고 호텔로 갔다. 그도 잡지 않았다. 연락처도 묻지 않았다. 집에 오니 담배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