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날이 되면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온도와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어릴 때 수능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생이 되고 수능을 봐야 하는데 나는 고1~2 때 수능을 봐야 하는 3학년이 되는 걸 고통스럽게 여겼다. 그건 마치 형벌 같았다. 무조건 봐야 하는 시험. 내 인생이 판가름 나는 시험. 피할 수 없지만 잘 봐야 하는 시험이기에 부담감이 컸고 그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느껴질만한 질량이었다.
고등학생 때 약 50여 명이 들어가는 심화반에 들어가 있었는데 거긴 아마 이과 반 문과 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절친 효경이가 같이 있었는데 거기서 공부한 애들은 많았겠지만 기억 속의 나는 그 공간에서 혼자 있거나 아니면 효경이와 바통을 터치하곤 하던 기억이다. 그리고 석식 시간이 되면 집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돌아와서 야자를 했는데 돌아오던 길의 어두움이 뇌리 한편엔 박혀있다. 가던 길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가로질러 가며 쇠락한 놀이 기구를 보며 걸으면 내 고등학교 담장의 풀이 보였다. 교문에서 교실로 가던 길까지는 조용하고 삭막한 분위기였는데 그건 그때의 내 감정이 그랬기 때문일 거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 때의 추억이 생각나는 것보다 떠올려지는 건 어두움, 마음의 건조함, 미세한 두통, 그런 것들이다. 단언할 수 있다. 그때의 난 절박했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수많은 문제집을 풀어 탑을 만들면서 성취감 이런 것들보다는 불안감, 조급함이 더 많았다. 많은 문제집을 풀었고 그만큼의 오답노트를 만들었지만 차오르는 느낌보다는 소모하는 느낌이 컸다.
수능 전에는 시험 볼 장소를 미리 갔다 오는 과정이 있는데 그 일정은 시험 2~3일 전이기 때문에 한번 학교를 다녀온 다음에는 시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덩달아 눈치를 보던 부모님의 감정까지 전해 느껴질 정도로 그 당시의 난 예민하고 심각했다. 치열하게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망칠 수도 있는 게 시험이었다. 실제로 1번째 시험에선 망쳐버리고 말았는데 그건 평소의 점수보다 현저히 낮은 점수여서 지금 생각하면 아마 전날 긴장으로 인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컨디션 조절도 못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시원하게 말아먹었고, 엄청 혼났고, 하지만 가장 속상한 건 나였다. 그때부터 결과가 과정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무리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개판이면 남겨지는 건 비난이었다. '열심히 노력했으니 된 거야'라는 위로 같은 건 사치였고 그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재수학원에 넣어져서 적어도 학교 선생보다는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배우면서 그간 했던 건 6시가 되면 눈을 떠서 1호선을 타고 노량진에 갔고, 수업을 듣고, 컵밥을 사 먹다가 노래방에 가고, 술을 먹고 낭만을 즐겼지만 이 땐 고3 때와 같이 불안하거나 초조하진 않았다. 단지 해야 했기에 정해진 시간에 공부를 했고 반 친구들에 휘말리지 않고 내 페이스를 가져간 게 유효했다. 점차 등수가 올라가서 탑 100에 드는 것도 좋았다.
다시 본 수능 전야엔 잠이 오지 않았고 어머니가 우유를 데워 주어서 잤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험을 보고 나와 채점을 했고 그날 오랜만에 밤늦게까지 나가 놀다가 왔다. 그렇게 밤거리를 걸으며 렌즈를 샀던 거 같고 몇 개를 쇼핑하다 들어와서 자다가 다음날 늦잠을 잔 건 지금까지 기억이 난다. 아주 오랜만의 단잠이었고 일어났을 때의 햇빛의 각도와 온도와 나른한 오전의 감각은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수능일이 되면 지금도 긴장이 된다. 지금 생각하면 어떤 대학을 갔더라도, 그 상황의 내 의지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당시에는 모를 일이었다.